폐암환자와 가족들이 KT&G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에서 지난 24일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원고패소 사유로 ‘원고가 폐암에 걸린 원인이 흡연에 의한 불가피한 결과라는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시했다. 통계적 연관성과 개별적 인과성은 다르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법적인 논리다.
주지하다시피 이번 소송의 가장 큰 쟁점은 ‘흡연과 폐암의 인과관계’였다. 재판부는 “공해소송처럼 증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사안이 아니다”라며 인과관계의 입증책임이 피해자 쪽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공해소송이 개별적 인과관계를 피해자가 입증하기 어렵다면, 장기흡연도 개별적 인과관계를 피해자가 입증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일 것 같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어렵다.
물론 장기흡연과 폐암 발병 사이의 역학적 인과관계는 인정받았다는 점은 진일보일 수 있다. 이번 판결은 담배가 무해하다는 결정이 아니다. 오히려 담배는 유해하다는 점을 재판부가 받아들였으며, 폐암환자들은 앞으로 자신의 폐암이 담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 남았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입증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문제도 있다. 원고 쪽이 항소의사를 밝혔으니 공방은 계속될 것이다.
아무튼 7년 5개월을 끌어온 소송이 ‘건강권’에 대한 소극적인 인식을 드러낸 것에 머물고 말았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크다. KT&G는 그동안 타르와 니코틴의 성분 분석 등 흡연의 폐해를 연구해온 자료들의 공개를 기피해왔다. 이 사실만으로도 KT&G가 흡연의 폐해를 은폐하고 흡연을 조장했다고 간주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미국 암협회는 작년 매년 1천만명이 흡연으로 인한 암 발병으로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경고를 내놓은 바 있다. 흡연으로 인한 국내 사망자는 연간 6천~8천명으로 추산되고 경제적 손실액도 6조원에 이른다. 미국의 경우 1990년대 후반부터 담배회사의 책임을 인정하는 사례가 종종 나오고 있다. 그러나 법원은 KT&G의 불법성과 고의성, 무책임 입증책임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법적 판단은 KT&G와 정부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지만, 행정적 판단은 전혀 다르다는 것도 이율배반적이다. 정부는 금연빌딩을 지정하고 담뱃값을 올려 흡연율을 떨어뜨리겠다는 정책을 쓰고 있다. 이번에 KT&G와 정부에게 무죄를 선고한 논리를 ‘금연빌딩’ 정책에 적용한다면, ‘금연빌딩’ 내 흡연자들의 흡연이 다른 비흡연자들의 건강에 유해하다는 사실을 정부가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 된다. 금연빌딩 내 근무하는 흡연자들이 이번 재판부의 판단을 인용해 ‘금연빌딩 해제’를 위한 행정소송이라도 낸다면 재미있는 상황이 전개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