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있어서는 안 될 '위험한 관계'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위험한 관계'
  • 이문원
  • 승인 2004.05.31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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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화제의 초점이 되고 있는 '근친상간' 소재 만화의 면모를 살펴본다
영화 <올드 보이>에 크게 자극을 받아 원작 만화를 읽어본 이들이라면 적잖게 당혹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의 '핵심'으로 작용하는 '근친상간'의 테마가 만화에는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역시 만화는 이런 논란적인 이야기는 하지 못하는군'이라며 책을 덮어버렸다면 이 또한 오산인데, 실제로 <올드 보이>라는 만화 자체가 근친상간과는 전혀 관계없는 내용일 뿐이지, 만화계는 오래 전부터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놓고 오랜 동안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근친상간물의 '주요 팬층'이라 할 수 있는 여성 독자들에 의해 다소간 가벼운 수준의 근친애 묘사는 순정만화의 '기본'처럼 여겨지게 되었을 정도. 이번에는 이들 근친상간을 테마로 한 여러 작품들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자 서로 상반되는 형식과 구조를 지닌 두 작품을 골라 그 묘사 방식과 세계관의 차이를 살펴보고, 그동안 터부로 여겨왔던 주제가 만화라는 언더-컬쳐 내에서 어느 정도까지 탐구되고 실험되어 왔나를 알아보기로 하겠다 토우메 케이의 <양의 노래> '근친상간'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로 레이디스 코믹 방면에서 고정 독자층을 확보하고 봇물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 등장한 토우메 케이의 <양의 노래>는, 다분히 저급하고 선정주의 일색으로 흐르던 근친상간 소재 만화의 '수준'을 현격히 업그레이드시킨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지극히 예민한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마치 일반 순정 만화처럼, 혹은 일반 헨타이 만화처럼 이를 묘사하고 있던 기존의 레이디스 코믹에 비해, <양의 노래>는 남매 간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애증의 틀의 '흡혈귀'라는 호러적 소재 속으로 가둬놓아 상징의 포맷을 마련하고, 이를 바탕으로 은근히, 마치 '노'극을 보듯 긴장의 고삐를 절대 늦추지 않으며 차근차근 남매 간의 관계를 묘사해내고 있다. 토우메 케이에게 있어 '근친상간'이란 가장 가까운 관계, 혈육 간의 완벽한 공감이자 동병상련이다. 어머니의 모습을 닮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근친상간을 벌인 - 물론 이야기 속에서는 '아버지의 피를 빨았다'는 흡혈귀 공식으로 은유화시키고 있다 - 한 소녀가, 이번에는 아버지와 꼭 닮은 남동생을 만나 그 관계를 재생시킨다는 내용을 담은 <양의 노래>는 소재를 다루는 방식의 파격성이나 남다른 주제의식보다도, 일단 드라마의 틀을 만들어내는 완성도에 있어서 단단하고 물샐 틈이 없으며, 순문학 이상의 세부묘사와 감정흐름의 포착에 성공한 흔치 않은 케이스로 보여진다. 결국 토우메 케이마저도 이 근친상간의 관계를 비극으로 끝맺는다는 점에서 여타 근친상간 소재 창작물이 기본적으로 갖는 '도덕률의 신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데, '근친상간'이라는 '죄'로 인해 병을 얻어 죽어가는 소녀와 그녀의 뒤를 따르려는 남동생의 묘사는 얼마 전까지 유행하던 '실낙원'물의 결말과 무서우리만치 흡사해 기묘한 감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유키 카오리의 <천사금렵구> <천사금렵구>가 <양의 노래>와 정확히 대치되는 점은, <양의 노래>가 '근친상간'이라는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공포' 장르의 형식과 아이템을 빌려온 반면, <천사금렵구>는 흔히 '격투 환타지'물로 일컬어지는 장르의 '신화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근친상간이라는 테마가 지니고 있는 절대적 비극성과 운명성을 차용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천사금렵구>는 신화성의 표현을 위해 현대사회의 두 가지 터부, 즉 근친간의 사랑과 기독교 사상의 파괴를 들이밀고 있다. 주인공 세쯔나와 사라는 남매이다. 유키 카오리는 이들 둘이 닿게 되는, 서로 열렬히 사랑하는 관계이긴 하나 '남매'이기에 불행을 맞이한다는 현대 윤리관에 대해 전혀 색다른 시선으로 '가치파괴'를 감행하고 있다. 바로, 고전적인 동양적 사상과 종교체계 내에서는 남매간의 사랑이 그닥 별스러울 것 없는, 자연스런 사랑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서양에서 유입된 기독교적 윤리관이 도래하면서 이들의 사랑이 급작스럽게 '죄악'으로 치부되기 시작했고, 급기야는 절대성을 띄기 시작했다는 것. 천사장들이 벌이는 사투와 복잡다단한 '천상계'의 암투는 바로 이런 기독교적 사상의 근본적 신화 파괴 의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고, 결국 유키 카오리가 말하고자 한 것은 '신화'의 폭넓고 여유있는, 갈등과 번민의 상황에 대해 여러 대안을 제시하는 사고방식과 현격히 대치되는 현대 사회 윤리관의 나약하고 얄팍한 기준과 틀, 자기 자신을 옭아매는 틀을 만들어내는 인간들의 기이한 사고관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됐건 <천사금렵구>는 주제 외적인 요소에서도 다양하게 성취를 거둬내고 있는 작품이다. 두 주인공의 성격묘사와 갈등묘사, 동기부여가 모두 지극히 격앙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나름대로 설득력을 확보해내고 있으며, 특히 액션 묘사와 프로덕션 디자인 상의 쾌거는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탁월한 수준이다. 절대 처지지 않는, 긴장과 해소의 구조를 명확히 꿰뚫고 있는 드라마 연출력 하나만으로도 이미 <천사금렵구>는 걸작의 반열에 올라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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