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에 사는 박모씨는 얼마 전 몇 년간 연락이 끊겼던 고교동창생 이모씨에게서 문자메시지 한통을 받았다. 반가운 마음에 휴대폰을 연 박씨는 급히 돈이 필요하니 200만원만 부쳐달라는 친구의 메시지를 접하게 됐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몇 년 만에 문자를 보냈을까 라는 딱한 마음이 든 이씨는 즉시 돈 200만원을 입금했다. 그러나 후에 알게 된 사실은 동창생 이씨는 문자를 보낸 적도 없거니와 통장에 돈이 들어온 적도 없다는 것. 최근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는 전화사기의 일종인 문자사기에 걸려든 것이다. 박씨는 “이제 우정까지 이용해 사기를 치니 누굴 믿어야 되나”라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처럼 전화를 이용한 사기행각, 일명 ‘보이스피싱’이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금까지 전국 경찰서에 접수된 전화사기 피해건수는 1606건으로 피해액은 137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대상 안 가리고 범행, 방법도 교묘해져
지난 해 6월부터 조직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전화사기의 배후에는 중국, 대만인 범죄조직이 버티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난 해 11월 전화사기 피의자로 검거된 중국인 4명은 중국계 폭력조직 삼합회의 하부조직인 ‘신의안파’ 소속 조직원으로 드러났다.
점조직 형태로 국내에 잠입한 이들은 서너 명씩 짝을 지어 여권위조, 국내 계좌개설, 현금인출, 해외송금 등으로 역할을 나눠 분담했다. 경찰은 “3~4년 전 대만에서 유행했던 전화사기가 더 이상 자국에서 통하지 않자 계좌 개설이나 휴대전화 개통이 쉬운 한국을 주요 범행 대상지로 삼고 있다”고 밝혔다.
전화를 이용한 사기는 신종사기수법이 아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농촌의 노인들을 상대로 한 전화사기는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주로 ‘아들, 딸이 위험하니 돈을 입금해라’와 같은 식이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일어나고 있는 전화사기는 그 대상이 광범위하고 방법도 한층 교묘하다는 것이 이전과의 차이점이다.
최근 일어난 전화사기수법을 들여다보면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가장 빈번하게 써먹는 수법은 가족 또는 친구를 납치했다거나 교통사고가 발생해 돈이 필요하다는 등의 협박으로 통장에 입금을 요구하는 것이다. 정모(45세· 여)씨는 지난달 “당신 딸을 납치해 데리고 있는데 당장 700만원을 입금하지 않으면 딸을 죽일 것이다”라는 협박전화를 받고 급히 돈을 송금했다. 돈을 입금한 뒤 딸이 오기만을 기다리던 정씨는 웃으며 귀가하는 딸을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정씨의 딸은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갔다가 아무 일 없이 하교한 것. 정씨는 전화사기에 걸려든 것을 깨닫고 경찰에 신고했고 수사 끝에 정씨에게 사기전화를 건 대만인 L씨를 검거했다. 경찰서에서 L씨는 “돈을 찾아 국외로 송금하는 일을 했다”며 “하루에 1억원까지도 인출해 봤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다음 유형은 검찰, 경찰등 공무원을 사칭해 인적사항, 계좌번호 등을 요구하는 경우다. 주로 사기사건에 당신이 연루됐다며 인적사항을 요구하거나 어딘가로 통장의 돈을 옮기라는 등의 주문을 하는 수법이다. 대학생 김모씨(24세 남)는 낯선 번호의 전화를 받았다. 전화에서는 한 남자가 자신이 형사라고 주장하며 “당신이 사기사건에 연루됐으니 법원에 출석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 남자는 “당신의 계좌에 있는 돈이 사기단에 의해 빠져나갈 수도 있다”며 “현금인출기를 이용해 계좌의 돈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주문했다. 뭔가 꺼림칙했지만 돈을 날릴수 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인 김씨는 계좌의 돈을 모두 다른 계좌로 이전하고 환급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돈은 환급되지 않았고 그제야 보이스피싱에 걸려들었음을 알았다. 김씨는 “초기의 멘트와 연결 시스템 등이 워낙 정교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고 회고했다.
이 밖에도 금융기관을 사칭, 신용카드 연체금을 빙자해 개인정보를 요구하는 경우, 기타 이유를 들어 주민등록번호, 계좌번호, 예금잔액 등 금융정보를 수집하는 경우 등이 있다.
이와 같이 보다 다양한 수법으로 벌어지고 있는 전화사기가 쉽게 이뤄지는 요인 중 하나로 발신번호의 조작이 가능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교환기나 소프트웨어설치로 간단하게 발신자 번호를 조작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휴대폰의 SMS문자 서비스를 이용할 때는 발신번호를 쉽게 바꿀 수 있어 전화사기에 매우 유용하게 이용된다. 그런데 이 같은 행위를 제재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이런 허점을 이용해 검찰과 법원 등 국가기관의 전화번호가 발신자번호로 표시되도록 조작해 철저하게 피해자를 속이는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관련법의 마련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처럼 요리조리 법망을 피해 빈번하게 전화사기가 일어나자 애꿎게 피해를 보는 곳도 생겼다. 실제로 계좌번호나 인적사항이 필요한 공공기관이나 금융기관 등에서 걸려온 전화를 사기전화로 의심하고 정보를 주지 않아 업무에 차질을 빚게 만드는 것이다. 전화사기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자를 양산할 뿐만 아니라 간접적인 손실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자나 깨나 전화조심, 예방만이 상책
시간도, 장소도, 대상도 가리지 않고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사기전화. 피해를 당하지 않을 방법은 결국 철저한 예방뿐이다.
몇 가지 사전지식만 가지고 있어도 전화사기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
알아 둘 지식으로는 현금인출기를 통해 세금과 보험금을 환급하는 경우는 없다는 점, 수사기관이 전화를 통해 개인의 금융 정보를 파악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 가족 납치 및 교통사고 협박의 경우는 당황하지 말고 전화 내용을 메모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점, 공무원을 사칭하는 경우 먼저 해당 기관에 확인해야 한다는 점 등이다. 이를 숙지하고 낯선 전화를 대한다면 사기꾼이 아무리 교묘한 말로 접근해도 걸려들 위험성은 줄어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