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에는 덕분에 수능시험을 본 아들이 대학도 포기하게 됐고 노부모가 생계까지 걱정을 하고 있어 감사드린다는 다분히 협박성이 짙은 내용이 씌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성폭행한 아이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안부를 묻고는 감옥에서 나가면 꼭 찾아뵙겠다는 말로 끝을 맺었다.
김씨는 이 편지를 받고 며칠을 밥도 넘기지 못하다 결국 범인이 모르는 곳으로 이사를 가기에 이르렀다. 범인의 보복이 두려워 20년간 일구어오던 삶의 터전을 버리게 된 것.
협박으로 그치지 않고 출감 후 실제로 증인이나 피해자를 찾아가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다반사다. 경기도의 한 유흥업소를 운영하는 양모(43)씨는 보호비를 갈취하던 조직폭력배 김모(32)씨의 착취사실을 법정에서 증언했다. 김씨는 출소하자마자 양씨를 찾아가 “너 때문에 내가 징역을 2년이나 살았다”며 협박했고 전치 3주의 폭행을 당하고 한 달간 550만원을 빼앗기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작년에는 류모씨(38 여)가 자신의 아들을 때렸다는 이유로 내연남 김모씨(42)를 신고해 변을 당했다. 김씨는 고소를 취하하라며 류씨의 얼굴에 염산을 뿌리고 각목으로 어깨를 내리쳐 전치 7주의 중상을 입혔다. 그래도 류씨가 고소를 취하하지 않자 김씨는 다시 찾아가 쇠파이프로 때리는 등의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범인 잡으면 피해자는 나 몰라라
이처럼 죄 값을 치루고 나온 범죄자들이 앙심을 품고 범죄 신고자나 법정 증인을 찾아가 복수를 하는 이른바 ‘보복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보복 범죄는 2000년 5465건, 2001년 4881건,2002년 4264건,2003년 3347건으로 줄어들다가 2004년 5543건으로 급증했고 2005년에도 4581건을 기록했다. 이 같은 수치는 재판에서 모든 증거자료를 공판에 집중시켜 공판정에서 형성된 심증만을 토대로 사안의 실체를 심판하는 원칙인 ‘공판중심주의’의 본격시행으로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공판중심주의에는 무엇보다 신고자와 증인의 법정증언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한번쯤 드는 생각은 어떻게 감옥에 들어간 범죄자가 증인이나 피해자의 주소 또는 전화번호를 알고 협박을 하거나, 실제로 범죄를 저지르는가 일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수사에 협조하고 범인을 잡게 만든 공로자를 범죄자로부터 적극 보호해 줘야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먼저 검찰의 수사기록과 재판진행을 담은 공판조서가 범죄자들이 보복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열쇠가 된다. 공판조서는 열람이나 복사가 가능한데 피해자는 물론이고 증인이나 참고인의 주민등록번호와 주소, 심지어 연락처까지 기재돼 있다. 열람이나 복사 과정에서 이런 신상정보가 전혀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것이다. 즉 아주 기초적인 부분에서도 증인 또는 피해자의 보호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보복범죄를 가능하게 하는 또 다른 원인은 수사과정에서 경찰의 부주의를 들 수 있다. 범죄신고자의 신분을 피의자에게 노출시키는 일이 허다하다는 것.
작년 9월 경기도 분당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A씨(30)는 건물외벽에 붙어 있는 송수관을 떼내는 사람을 목격, 곧바로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출동한 경찰관은 A씨에게 수사협조를 요청하고 함께 피의자 검거에 나섰고 30분쯤 뒤 피의자 2명을 현장에서 붙잡았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경찰관이 지구대로 피의자들을 이송하면서 신고한 A씨와 피의자를 같은 순찰차량에 태운 것. A씨는 신고를 했다는 이유로 꼼짝없이 범인들과 얼굴을 마주치게 됐고 불안에 떨며 지구대에 이르렀고 그곳에서도 피의자들과 함께 해야 했다.
그렇게 범인들에게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얼굴을 보인 A씨는 경찰서장에게 면담을 신청해 “굳이 현장에 같이 가야했는지도 의문이거니와 왜 범인과 같은 차를 타고 가야 했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고 항의했다. 또 A씨는 “이러면 누가 경찰을 믿고 범죄를 신고하겠느냐”며 “아직도 피의자의 얼굴이 떠올라 불안하다”고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이처럼 허술한 증인, 피해자 보호체계로 인해 보복범죄가 쉽게 이뤄지고 있지만 범죄자에게 따르는 댓가는 그리 가혹하지 않다. 첫 번째로 범행을 저질렀을 때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벌이 가해진다는 것. 1990년 증인보호를 위해 보복범죄를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에 포함시켰지만 적극 활용되지 않고 있어서다. 2005년의 경우 총 4581건의 보복범죄가 신고됐지만 그 중 특가법상 보복범죄 혐의로 기소한 경우는 고작 58건에 불과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한다. 이에 대해 대검 관계자는 “아직 보복범죄에 관해 특별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범죄를 목격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신고했다는 이유로, 범죄를 당했다는 이유로 속수무책 복수에 응해줘야 하는 것인가. 물론 신고자와 증인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존재하기는 하다. 2002년부터 시행된 ‘특정범죄신고자 등 보호법’이 그것. 이는 특정범죄에 관한 형사절차에서 국민이 안심하고 자발적으로 협조할 수 있도록 범죄 신고자 등을 실질적으로 보호함으로써 범죄로부터 사회를 방위하는 데 이바지하기 위해 제정한 법이다.
그러나 이 법은 범죄 신고자 등이 보복당할 우려가 큰 살인이나 마약, 조직폭력과 같은 특정범죄에만 적용되기 때문에 일반 형사사건의 경우에는 보복범죄에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다는 맹점이 있다.
그리고 올해부터 수형자를 가석방할 때 피해자의 의견을 물어 가석방 여부를 결정하는 법이 시행되고 있다. 피해자의 의견을 존중함으로써 보복범죄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다. 어떤 모범수라도 피해자가 가석방을 극구 반대하면 수형자는 자유의 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법무부 인권국 구조지원과 김준연 검사는 “지금껏 피해자가 사건 당사자임에도 사건처리과정에서 그에 맞는 처우를 받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라며 “가석방 결정 참여 외에도 피해자가 사건처리과정에서 자신의 권리를 행사토록 제도적 장치를 보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보복범죄로부터 피해자와 증인을 보호할 또 다른 방패막은 ‘범죄 피해자 지원센터’다. 이는 수사나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나 증인이 불안을 호소하면 신변보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기관이다. 전국에 분포된 이 센터의 문을 두드리면 불안감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법적, 제도적장치가 마련되 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 보다는 소를 잃을 가능성을 애초에 차단하는 것이다. 보복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요소들을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 즉 증인이나 피해자의 신변이 범인에게 노출되지 않을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국민들의 투철한 신고정신을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를 위해 경찰은 수사기록을 제출할 때 피해자나 참고인의 인적사항을 모두 삭제하고 제출하는 방안을 검토 중에 있으나 말 그대로 검토 중일 뿐이다.
공판중심주의 시행, 보복범죄 양산?
앞서 언급했듯이 공판중심주의의 본격 시행으로 피해자나 증인의 증언이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면서 보복범죄의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기존의 검찰 수사기록을 위주로 재판해온 관행을 벗어나 범인 자신의 유, 무죄여부를 결정한 사람이 누구인가가 명확해지면서 복수를 다짐하는 경우가 늘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공판중심주의의 취지를 이루면서도 증인 또는 피해자를 보호할 수 있는 방안의 마련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