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영화리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 이문원
  • 승인 2004.06.03 13: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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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믿을 수 없는' 영화, 모두가 '믿기 싫은' 진실
너무나도 완벽한 영화를 보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너무 많은 문제를 지니고 있는 영화에 대해선 무슨 이야기부터 꺼내야 할 지 모르겠다. 그저, 모든 요소가 기존의 영화들이 '확인'해 준 바 있는 최악의 경로를 착실히 밟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최악의 상황'을 끝없이 창조해내고 있어 조금 변태적인 종류의 재미가 느껴진다는, 쓴웃음이 나오는 심경토로 외에는 말이다. <엽기적인 그녀>를 '한국형 흥행영화'의 선구자격 존재로 끌어올린 곽재용-전지현 콤비의 재결성작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는 바로 이런, 도무지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아니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과연 가치가 있을 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드는 영화이다. 일단,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이하 <여친소>)는 아무리 봐도 '각본 없이 찍은 영화'의 티가 난다. 그것도 왕가위나 홍상수처럼, '상황의 묘사'에 중점을 두기에 뚜렷한 이야기구조를 '파괴'해버린 경우가 아니라, 흐릿하게 기본 줄거리만을 만들어놓고 여기서 따온 이런 에피소드, 저기서 주워들은 저런 에피소드들을 무더기로 덧붙여 찍은 뒤, 결말조차 생각해보지 않은 채 촬영을 끝내버린, 그리고 이런 자신감/오만함/무모함을 안고 편집실로 들어가 난장판을 만들어놓은 경우인 것이다. 이 영화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리고 진정으로 '이야기가 없는' 영화들이 으레 그러하듯, 너무나도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무지 같은 영화라고 생각될 수 없을 법한 갖가지 성격의 이야기들이 하나의 릴 안에 막무가내로 이어붙여져 있으며,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로맨스 드라마로, 환타지물로, 형사물로 끝없이 변모하며 '난잡함'에 대한 관객들의 적응력을 시험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모두 네 번의 엔딩이 존재한다. 그리고 확신하건데, 감독은 이 네 가지 엔딩 중 무엇을 '최종본'에 넣을까 편집종료시까지 고민했을 것이 분명하다. 여기서 곽재용 감독의 우둔함을 또다시 발견할 수 있는데, 그는 이 네 엔딩 중 하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이유에선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중 세 가지를 '잔가지 에피소드'식으로 이야기 속에 우겨넣어 극의 흐름을 완전히 와해시키고 난 뒤, 흐릿한 엔딩 또 하나를 슬쩍 들이밀고는 이 모든 여정이 끝났음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안 그래도 얼기설기 뒤죽박죽으로 붙여놓은 플롯에다, 상상을 초월하는 동일상황 반복이 작열하고 있는 가운데 펼쳐지는 이 '엔딩의 연속'은, 이쯤되면 가히 '의도적인' 인내력 테스트가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로 고통스럽다. 영화의 구조를 이루는 비쥬얼 테크닉은 또 어떠한가. 프랑스의 비평가들은 뤽 베송의 <니키타>를 보고 'CF적 이미지들을 연속시켰을 뿐'이라 혹평한 바 있지만, 이들이 <여친소>를 보았더라면 조소를 넘어서 가히 아방가르드급의 도전적인 작품이라 여겼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도 그럴것이, <여친소>는 'CF적 이미지'를 연속시킨 것이 아니라, 'CF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수없이 많은 30초 짜리 이미지 시퀀스가 달가닥거리며 이어붙여져 있고, 그것도 '보기에 예쁜 화면'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홍보 CF에 넣기 좋은 이미지'들만을 고의적으로 찍어댄 듯한 느낌이 강하며, 제작상에 어떤 거래가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영화상에서 '비요뜨'를 먹고, '지오다노' 티셔츠를 입고 다니며, '라네즈' 간판 앞에서 서성이는 전지현을 보는 일은 그대로 '홍보효과를 감안한 영화'와 '극장상영용으로 제작된 찌라시' 사이의 '두텁다 여겼던' 벽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있다. 드라마 파트의 연출은 이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일단 '구의원'이 파출소를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초반 시퀀스를 일례로 들어보자. 끊임없이, 아무 이유없이, 시퀀스가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인물들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열악한 제작여건의 B급 영화나 심지어 비디오용 에로영화에서도 '차마' 사용하지 않는 이 무뇌아적 카메라워크를 보며 관객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하게 될 것인가. 하지만, 이 시퀀스가 주는 '충격'은 아마 관객들 뇌리에서 금새 잊혀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여친소>에는 이보다 더 끔찍스런 장면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사' 뮤직 비디오 스타일 연출과 미디엄 클로즈업이 연발되는 TV 드라마 스타일 연출이 어이없게 맞닥뜨려지는 모습은 그나마 참을 만하다. 기본적인 '컷매칭'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듯한, 어쩌면 '요즘 트렌드는 역시 비매칭이니까'라는 기이한 확신 하에 자행된 듯한 누더기 드라마 파트는 이미 인물의 동선 설정이나 동작진행방향 일치 따위는 멀리 날려 보낸지 오래고, '영화'라는 쟝르의 극형식을 이루는 기본조건이 과연 충족되고 있긴 한건지에 대한 의구심마저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런 극악스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 극흐름을 일치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젊고 재능있는 두 주연배우의 모습은 차마 안쓰럽기까지 하다. 영화 속 그 어느 장면에도 제대로 부합되지 못한 채 스크린 위를 부유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들은, 한 눈에 보이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배우로서의 재량'을 통해 연출상의 미비점을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직무유기'의 질타를 모면하기 힘들 듯 보인다. 그러나 어찌 보면 이 두 주연배우야말로 <여친소>에 의한 최대 피해자이기도 한데, 도무지 '같은 인물'로 보이지도 않는 연속적 이미지상의 동일 피사체를 연기하면서, 이들은 자신들의 고정 이미지를 새롭게 재편하지도, 그저 답습하는 정도도 이루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을 몸소 겪고 있으며, 여기에 영화제작에 가담한 모든 이들의 어리석음, 나약함, 무책임함을 직접 '육화'시켜 드러내어 주는 '화살받이'의 역할이 이 두 주연배우에게 떠넘겨지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여친소>의 끄트머리 즈음, 영화의 유일한 볼거리인 전지현 - 그녀의 외모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 은 바람불어 오는 창가에 서서 연인의 존재를 느끼고는 이렇게 외쳐댄다. "난 믿을 수가 없어!" 이것은 전지현이 분한 영화 속 인물, 경진만이 느끼는 감흥은 아닐 것이다. <엽기적인 그녀>의 성공을 목격하고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홍콩 제작자는 동일한 '팀'에서 이런 쓰레기가 나왔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테고, 배우들은 오직 상업적 목적 하나만을 보고 출연한 이 영화가 오히려 자신의 상업적 가능성을 깎아내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자회견장에서 그리도 태연한 모습을 보여주던 감독은 왜 이 영화를 가지고 그렇게들 불만인 건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 관객들은, 이런 영화가 버젓이 제작돼서 같은 돈을 받고 태연히 상영되리라는 사실 자체를 믿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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