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아이템으로 끝없이 사랑받고 있는 '수갑 찬 연인'의 테마. 그 다양한 양상을 살펴보자
흔히 '클리셰'라 불리우는 영화 속 고정 공식들이 있다. 헤어진 남녀의 재회 장면에선 카메라가 이 두 사람 주위를 빙글빙글 돈다거가, 이별 장면에선 비가 내린다거가 하는, 참 진부하기 짝이 없는 공식들과 함께 그만큼 자주 쓰여 '패러디'의 대상으로까지 자리잡지는 않았어도 종종 영화 속 아이템으로 등장하여 오래된 재미를 다시 선사해주는 '고전 클리셰'도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이번에 소개하는 '수갑으로 묶인 두 연인'의 아이템 역시 따지고보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영화 장르에서 사용해 오던 것으로, 그 시초는 경찰권력에 대한 다소 풍자적인 무대희극에서 발생되었다 여겨지고 있지만, 결국 '경찰'이라는 존재의 상징에서 멀리 벗어나 두 연인의 '어쩔 수 없는' 결속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좀처럼 '붙어다니기 힘든' 듯 보이는 두 연인을 '어떻게 해서든' 한 공간, 한 시간대 위에 세워놓고 함께 호흡하게 하기 위해 차용되고 있는, 다소간 억지스런 아이템으로 영화 장르 내에서 진화해온 것. 이제 이 기묘한, 유치한, 어리석은, 그러나 여전히 흥미를 끄는, 지난 수십년 간 꾸준히 지속되어 온 '수갑으로 묶인 두 연인'의 테마 속으로 빠져들어 보자.
■ 39계단 (1935)
감독: 알프레드 히치코크
출연: 로버트 도냇, 매들린 캐롤, 루시 맨하임
모든 '수갑으로 묶인 두 연인' 테마의 '아버지'격 작품이다. 아마도 동일설정이 스크린에 등장한 최초로 예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 설정에서 파생될 수 있는 모든 아이러니와 유머, 슬랩스틱적 요소들이 히치코크적 아이디어에 의해 다양하고 연속적으로 펼쳐지고 있다.
기본 설정 자체는 1930년대에 유행하던 '누명을 쓴 남자'의 테마에서 '수갑'의 테마만을 따로 떼어놓은 것으로서, 여기에 '두 사람'이 함께 수갑에 묶여있을 때 벌어지는 '딜레마의 희극' 요소를 가미하고, 다시 여기에 '연인'이라는 요소를 추가하여,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화학작용이 물리적 강압에 의해 증폭될 수 있다는 새로운 드라마투르기적 개념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으로 판명되었고, 아마도 히치코크 영화에서 쓰인 수많은 테크닉/아이디어들 중 <싸이코>(1960)의 샤워실 장면과 함께 후대 영화 제작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 프로젝트 A2 (1987)
감독: 성룡
출연: 성룡, 장만옥, 관지림
<39계단>으로부터 오랜 세월이 지난 뒤, 그리고 그간 헐리우드 내에서 수백 번의 변천과정을 거친 뒤, 마침내 '수갑으로 묶인 두 연인' 공식은 멀리 아시아의 홍콩에서, 그것도 아시아 최고의 액션 스타 성룡의 영화에서 부활하게 되었다. 성룡영화의 '르네상스'로 기억되는 <프로젝트 A>의 속편 <프로젝트 A2>에서 성룡은 의도적으로 <39계단>을 오마쥬하고 있는데, 이는 전편에서 무성영화 슬랩스틱 히어로인 해롤드 로이드와 버스터 키튼 영화들의 명장면을 오마쥬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광으로서의 성룡의 면모를 재입증시키는 일례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성룡이 <39계단>의 수갑 시퀀스가 지니고 있는 모든 요소들을 그대로 카피한 것만은 아니다. 성룡은 여성에서 남성으로 자신과 수갑으로 엮인 인물을 변동시켜가며 이 길고 유쾌한 시퀀스를 이어내고 있는데, <프로젝트 A2>의 수갑 시퀀스는 사실 시퀀스 자체를 완전히 삭제시켜 놓아도 이야기의 흐름 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이드 시퀀스'에 속한다. 이는 <39계단>에서 두 인물 간의 관계 재설정을 돕는 작용을 하고 있는 수갑 시퀀스와 가장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 부분이며, 극중 아무런 작용을 하지 못하는 대신 슬랩스틱적 요소가 가장 폭발적으로 작열하고 있고, 히치코크마저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여러 아이러니의 요소들 - 아마도 버스터 키튼이라면 생각해냈을 지도 모르겠다 - 이 차례로, 순식간에 펼쳐져 보는 이들을 감탄시킨다. 성룡은 <39계단>의 수갑 시퀀스에서, 시퀀스 자체가 지니는 비쥬얼 개그의 요소만을 주목했던 듯 싶다.
■ 전선 위의 참새 (1990)
감독: 존 배덤
출연: 멜 깁슨, 골디 혼, 데이비드 캐러다인
<전선 위의 참새>의 경우, <프로젝트 A2>와 정확히 대치되는 양상을 보인다. 즉, <39계단>의 수갑 시퀀스에서 이 장면이 지니는 슬랩스틱적 요소들은 그닥 신경쓰지 않은 듯하고, 오직 수갑으로 묶여있는 두 사람의 '관계'에만 주목하고 있는 것. '죽은 것'으로 가장하고 아내 곁을 떠난 비밀요원(멜 깁슨)이 다시 전아내(골디 혼)와 우연찮게 마주치게 되는 시점, 그리고 이 두 사람이 함께 뒤쫓겨야 하는 시점에서 등장한 '수갑'의 요소는, 서로에게 화가 났고, 서로를 오해하고 있으며, 서로 같이 있기를 거부하는 두 사람을 '어쩔 수 없이' 함께 행동하도록 하는 커뮤니케이션 장치로써 활용되고 있다.
슬립스틱적 요소가 전혀 없다고는 볼 수 없지만, 절대 '활용'되고 있다고 보기에는 힘들며, 결국 '수갑'이라는 장치는 이 두 사람을 '대화'하게끔, 이 두사람이 서로의 오해를 풀고, 오랜 옛 정을 다시 되살리게 하는 관계 재설정의 장치로서만 차용되고 있는 셈이다. 굳이 슬랩스틱을 원하지 않는 드라마 영화에서 '수갑'이 등장하게 될 때에는 이와 유사한 패턴으로 '장치적 차용'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대단히 무거운 형사 드라마인 <노 머시>(1987)에 등장한 '수갑'의 이미지도 이처럼 '관계'만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용된 바 있다.
■ 스피드 (1994)
감독: 얀 드봉
출연: 키아누 리브스, 산드라 불록, 데니스 호퍼
3000만 달러 정도의 중소영화 제작비로 스매쉬 히트를 기록한 <스피드>의 경우, 주인공 두 사람이 '수갑'으로 묶이는 시퀀스 자체가 짧고, 또 영화 내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뒤에 언급한 몇 가지 경우, 즉 <39계단>으로부터 파생된 여러 양상들과 사뭇 다른 방향을 띠고 있기에 주목해 볼만 하다.
<스피드>에 등장하는 수갑 시퀀스는 영화의 끝무렵에 등장한다. 두 주인공이 갇힌 공간 - 폭탄이 장치된 버스 - 에서 서로 완벽히 교류하고, 서로에게 애정과 관심을 느끼며 서로 간의 관계를 어느 정도 확립했을 시점에 이 둘이 달리는 전철 안에서 '수갑'에 묶이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바로, 달리는 전철이 통제력을 잃고 지상을 뚫고 올라가려는 위급상황에서, 두 사람이 서로를 보호하기 위해 수갑을 전철 안전봉에 묶은 상황인 것. 이 장면은 슬랩스틱적 요소가 완전히 배제되어 있음은 물론이고, 두 사람의 '커뮤니케이션' 장으로서도 그닥 활약하지 못하고 있는데, 대신 이들 서로가 '운명공동체'임을 자각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히' 결정지어 주는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두 사람이 수갑에 묶이는 것을 '합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에게 '수갑'은 '애정'과 '신뢰'에 대한 하나의 상징인 것이다.
어찌보면, 이 영화에는 '수갑'이라는 고정 이미지가 아예 필요없었을는 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는 '내릴 수 없는 버스' 설정 자체가 이미 '수갑'을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원치 않더라도' 이들 두 인물은 같은 공간, 같은 시간을 함께 보냈고, 이들의 관계는 재설정되었으며, '수갑'으로 완전히 일체를 이루게 된 셈이다.
■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2004)
감독: 곽재용
출연: 장혁, 전지현
<39계단>으로부터 무려 69년, 아시아의 동일설정 최초주자였던 <프로젝트 A2>로부터도 17년이 흐른 뒤에, 마침내 한국에서도 '수갑으로 묶인 두 연인' 설정이 등장했다. 그간 이 설정이 조금씩 비틀린 사이드 에피소드로 활용된 일은 있어도,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서처럼 '전면적으로' 도입된 것은 처음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는데, 불행히도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에 등장하는 '수갑'의 설정은 지금껏 여러 영화에서 등장했던 동일설정 중 가장 졸속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단 주인공 여성 - 물론, '한국적 리얼리즘'에 입각하여 '수갑'을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경찰'이다 - 이 상대 남성에게 수갑을 채우는 이유가 불분명하다. 상대 남성이 자신과 함께 위험한 상황을 겪게 하려는 의도 정도로 파악될 수 있지만, 왜 그래야만 하는 지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없고, 더군다나 이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이 친숙해진다는 설정이 등장하긴 하지만, 이 역시 그 근거를 알 수가 없다. 한 마디로 설득력이 현격히 떨어지는 설정인 것.
'수갑'이라는 아이템까지 차용한 설정치곤 슬랩스틱적 아이디어가 상당히 빈약하고, 이를 통해 관계의 재설정이 이루어지는 과정 역시 빈약하며, 그저 여러 영화에 등장하는 '수갑'이라는 아이템을 한번 사용해 보고 싶었던 것 정도로 이해되고 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