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월드 페스티벌 2004'에서 만난 여농미술관 조정우 관장
지난 5월 29일, 서울 코엑스 컨벤션홀에서 열린 '티월드 페스티벌 2004'에서 다시 만난 여농미술관 조정우 관장은 어딘지 피로한 기색이 만연했다. 그간 어렵게만, 고급문화 내지는 고식적 문화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차(茶)를 일반 대중에게 알기 쉽게 전파하고 일상의 생활문화로 즐기기 위해 기획된 국제 차문화 대전이기에 그로서는 자신의 예술적 감수성과 우리것 지키기에 대한 뜻을 펼쳐보일 수 있을 더없는 '장'일진데, 이렇듯 어딘지 지쳐보이는 조관장의 모습은 조금 뜻밖이었다. 흔치 않은 축제를 맞아 몰려든 시끌벅적한 관람객들 속에서, 조관장은 조용히 차 한잔을 따르고는 "세팅을 다시 했어야 했는데..."라는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읊조리며 기자에게 이번에 새로 선보이는 신작들을 설명해 나가기 시작했다.
전혀 새로운 기획, 대담하고 야심찬 상상력
한 눈에 관람객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그의 신작 차상 '물·바람·소리'는 조정우 관장이 지니고 있던 사색적인 '구도자' 이미지를 단박에 깨고, 도발성과 깊이를 동시에 지닌 탁월한 '동시대 예술가'로서 재인식시켜 주고 있는 작품이다. 국산 대리석으로 무려 3개월에 걸쳐 제작된 노작 '물·바람·소리'는 '물이 그려내는 이미지'와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는 문양'이라는 두 가지 화두로 접근했던 <돌 차상>전의 작품들과 달리, '소리'로서 '시각적 이미지'를 전달하는 대담한 이미지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 중 가장 빠른 속도로 물이 빠져나가도록 고안된 이 작품은, 그 빠른 물흐름의 소리가 마치 '회오리'처럼 울려퍼져 가깝게는 초고속으로 진행되는 현대문명의 발자취를 생각해낼 수 있고, 멀리로는 같은 '회오리'의 모양새로 펼쳐져 있는 '은하'의 모습, 우주를 수놓고 있는 폭넓은 영상을 마음 속으로 짚어내도록 유도하고 있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차상의 한 가운데에 초를 꽂는다는 일상적 '인테리어'에 제의적 상징성을 부여해, '우주'를 압축시킨 차상 안에 '근원'으로서의 '화염'을 배치시킨다는, 미학적 균형성과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추구하는 발상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아직 이름을 붙이지 않아 '무제'로 부르고 있는 연꽃 모양 신작의 경우 이와는 또다른 방향성을 보여주고 있다. 그린마블을 이용해 차상 자체를 연꽃의 '대체 이미지'로 삼고 있는 이 작품은, 연잎이 많은 양의 물을 머금어 물을 떨어뜨리는 시각적 이미지와 소리를 그대로 작품 안으로 쏟아넣어, 실제로 작품 안의 연잎이 물을 담고 이를 떨어뜨리는 소리가 재현되도록 제작되어 있다. '물·바람·소리'의 '연상작용'과 달리, 자연에 대한 '유사이미지'의 영역으로 미의식 세계를 틀어낸 이 작품은 조관장이 단기간 내에 여러 가지 방향성을 머금고 작업에 임하고 있음을, 그리고 동일한 원천 내에서 수없이 뻗어있는 그의 무한한 상상력을 입증하고 있는 일례이기도 하다.
전등사의 이미지를 물로 그려내 <돌 차상> 전의 방향과 궤를 같이하고 있는 '전등사 동문', 일본 후지산의 모습을 마치 데칼코마니를 하듯 양편으로 나누어, 물에 비친 이미지와 실제 이미지를 '화염'으로 가르고 있는 '후지산' 역시 그의 시각적 상상력과 함께 '물'과 '돌'에 대한 그의 강렬한 애착, 탐구심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다.
'우리화'된다는 것, 그 가깝고도 먼 화두
'티월드 페스티벌' 행사장 안, 여농미술관의 부스는 유난히 북적거렸다. 합천 해인사 다경원의 회장스님인 종광 스님과 전대 회장 스님인 선학 스님이 차 시음용으로 설치해놓은 차상 앞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대만에서 3대째 '이산차(梨山茶)'라는 차 브랜드를 만들어 온 차 장인 '퐁파오화'씨도 이 부스를 찾아, '차상을 만드는 데 원석작업을 하는 이는 전세계에서 조정우 뿐'이라 말하며 자신의 차를 조정우 관장의 차상 위에서 시험하고 있었다.
조관장은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어딘지 씁쓸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며 나직이 말했다. "이렇게 외국 손님들도 많이 찾아 오시는데, 큰일이네..." 그리고 그는 이번 페스티벌의 아쉬운 점에 대해 찬찬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 행사 자체를 잘못 이해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곳은 '우리' 차문화를 이야기하고, 보여주며, 알리는 곳입니다. 그런데 행사장의 한쪽에선 버젓이 중국 차상을 가져다놓고 우리 차문화를 이야기하는 촌극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긴 분명히 산업박람회가 아닙니다. 싸고 좋은 물건 사가는 곳이 아니라, 한 나라의 '문화'가 어느 수준에 올라와 있으며,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가를 지켜볼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왜 1분 30초에 서른개씩 찍어내는 공산품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야 합니까. 2톤 짜리 돌을 잘라내서 꼬박 석달 동안 작업한 제 물건과 3초에 하나씩 찍혀나오는 물건이 같은 자리에서 '경쟁'을 하는 판국이 된 겁니다. 저는 경쟁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세계를 받아들이고, 서로 교류하는 장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이 갑자기 경제논리의 현장으로 돌변해 버린 겁니다"
한참을 '우리 문화'와 '우리 정서'의 중요성에 대해 강한 어조로 성토한 뒤, 조관장은 앞서 언급한 '세팅'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를 묻는 기자의 질문에 착잡한 표정으로 자신의 심경을 털어놓았다.
"내가 장소를 잘못 이해하고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 겁니다. 여길 찾아오시는 분들이 중국산 물건이나 공산품과의 차이를 더 확연하게 느낄 수 있도록, 노고를 들인 작품이 어떤 것인지를 더 잘 알 수 있도록 효과적으로 세팅을 했어야 했는데...그저 담백하게 차상만 밀어놓아도 가치를 알릴 수 있을거라 생각한거죠"
조정우 관장의 이야기를 씁쓸하게 곱씹으며 부스를 나설 즈음, 아이를 안고 들어온 한 관람객이 여농미술관 부스 주위를 기웃거리다 안으로 성큼 들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묵직한 조관장의 노작들을 '나와는 맞지 않는 세계'라는 어색한 시선으로 훑어내리다, 조관장이 차상 위에 살며시 내민 차 한잔을 받아들고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의 얼굴에서 어색한 기운이 가시고, 시원하고 자연스런 미소가 퍼져나감을 볼 수 있었다. 이 푸근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관장이 오랜 동안 그렇게도 강력하게 주장하던, '우리는 결국 '우리것' 안에서 편안해질 수 밖에 없으리라'는 이야기가 처음으로 가슴 깊이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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