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투모로우
[영화리뷰] 투모로우
  • 이문원
  • 승인 2004.06.09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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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것은 '데카당스'를 통해서만 얻어진다
<투모로우>의 중반 무렵, 별다른 목적없이 등장한 한 장면에 반해 버렸다. 해일로 인해 물바다가 된 뉴욕의 빌딩 숲 사이를 러시아 화물선이 천천히 항해하는 장면. 이 무섭고 신비스러우며 압도적인 장면은 극장을 나선 뒤에도 잊혀지지 않은 채 머리 속을 맴돌았다. 그리고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투모로우>는 이 장면을 전후로 양분되어, 눈을 믿기 힘든 재난의 일대 스펙터클과 지지부진한 클리셰 드라마파트로 나뉘어진다는 사실을. 일단, '재난 영화'라는 변종 장르가 어떤 식으로 '생성'되었는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자. 1970년대, 어윈 앨런 - 당시에는 조엘 실버급의 비난을 받던 상업영화 제작자/감독이었다 - 에 의해 축조된 '재난 영화'의 구조는 기본적으로 존 포드의 <허리케인>(1937)이 보여준 '자연 재해'의 스펙터클한 요소에 에드먼드 굴딩의 <그랜드 호텔>(1932)이 처음 시도한 '멀티 캐릭터' 구성을 가미시킨 형식이었다. 따라서 재난의 다양한 양상을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여러 인물의 '사생활'이 초반에 비춰지게 되고, 이후 '재난'을 통해 이들의 삶이 어떤 식으로 변모하는 지를 관찰한다는 것이 재난 영화 플롯의 '모든 것'이었는데, 여기에 가능한한 드라마 파트는 진부하고 감상적으로, 재난 장면은 거칠고 과장되게, 결론부는 언제나 '희망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교훈성 엔딩으로 끝맺어야 관객들의 반응이 가장 좋다는 '신화'가 지난 30여년 간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던 셈이다. 주제도 항상 같다. 자연의 위대함과 인간의 테크놀로지 맹신이 낳은 비극. 그리고 인간은 자연 앞에 겸허해져야 한다는, 참으로 초등학교 교과서적인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인간의 오만함과 무책임함에 의해 지구에 '빙하기'가 다시 도래하게 된다는, 참 믿기 힘든 이야기를 다룬 <투모로우>의 모든 약점과 단점들은 그닥 탓할 만한 것이 못 될는지도 모른다. 그저 '공식'을 따르고, '신화'를 신봉한 '착한 어린이'에 불과할 뿐. 물론 로버트 알트먼의 <숏 컷>처럼 '재난 영화'의 공식을 비틀어 풍자한 - <숏 컷>의 구조가, 그리고 <숏 컷>을 오마쥬한 폴 토머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의 구조가 '재난 영화'의 그것과 얼마나 유사한 지를 되짚어보라! - 흥미로운 경우들이 존재하긴 해도, 이같은 도발적 상상력보다 주어진 틀을 깔끔하고 단정하게 메우는 성실성, 그리고 '빙하기'가 다시 도래한다는 식의, 단숨에 이목을 끄는 '깨는 설정'이 엔터테인먼트 계열에선 더욱 필요로 한 것일지 모른다. 엄청난 특수 효과와 박력있는 액션 연출, 지분덕거리는 드라마 파트가 한 데 뒤얽혀있는 '재난 영화' 공식의 가장 성실한 결정체 <투모로우>를 감상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기묘한 쾌감을 선사해주고 있다. 정신을 완전히 빼앗겨 버릴 정도로 탁월하게 이끌어진 엔터테인먼트도 아니다. 그렇다고 독특한 설정으로 흥미를 잡아끄는 영화에선 더더욱 멀리 있다. <투모로우>를 감상하는 일은, 곧 '확인'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재난 영화'의 오래된 즐거움이 과연 어떤 것이었는지, 왜 우리는 이 장르를 그토록 즐기며, 왜 '이런 식으로 만들어야만'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어쩌면 지지부진한 드라마 파트 덕분에 박력있는 액션 묘사가 한층 더 돋보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도 안 되는 상황설정이 있어야만 인물들의 유치한 행동과 대사들이 공감대를 형성해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됐건, 이 모든 '공식'들이 모여진 결정체는 '힘'을 발휘해서 독보적인 장르의 영역으로 관객들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 어떤 영화는, 관객들에게 절대 잊혀지지 않는, 이처럼 엉뚱하고 유치한 설정과 전개과정을 통해서만 등장할 수 있는 이미지를 선사해주기도 한다. 육중한 몸체를 삐끄덕대고, 뒤흔들며, 유유히 맨하탄 5번가를 미끄러져 지나가던 러시아 화물선의 이미지와 같은 것 말이다. 생각컨데, 어떤 종류의 돋보이는 예술적 발아는 오직 장르의 데카당스를 통해서만 발현될 수 있는 것인 듯도 하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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