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가 연일 적신호를 울리고 있지만 미래는 고사하고 오로지 과거사 들춰내기 바쁜 현 정권 하에서 이번엔 40년 가까이 된 1980년 ‘서울의 봄’ 진술서를 놓고 진실공방이 벌어지고 있어 참으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의외로 이 같은 때 아닌 진술서 진실공방을 일으킨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니고 직업인으로서 더 이상 정치하지 않겠다며 대선후보 여론조사에서도 자신을 빼달라고 호소했던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다.
유 이사장은 지난달 20일 KBS2TV ‘대화의 희열’과 유튜브 채널 ‘알릴레오’를 통해 과거 1980년 자신이 학생운동 했었던 시절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에 연행됐을 때 진술서를 쓴 일을 거론하면서 본인 스스로 이 논란에 먼저 불을 지폈다.
먼저 방송에서 유 이사장은 “누구를 붙잡는 데 필요한 정보, 이런 거는 노출 안 시키고 우리 또 학생회 말고 다른 비밀조직은 노출 안 시키면서 모든 일이 학생회 차원에서 이뤄진 걸로 (보이게 했다)”고 했었는데, 당장 심재철 자유한국당 의원이 “당시 유 이사장의 자필 진술서는 민주화 인사 77명의 목을 겨누는 칼이 됐다”고 지적하자 도리어 자신은 심 의원이 먼저 합수부에서 작성한 진술서를 토대로 작성한 것이라고 강변했다.
하지만 심 의원이 6일 공개한 유 이사장 진술서 원본엔 작성날짜가 심 의원이 체포되기 전인 1980년 6월 12일이고 유 이사장의 지장까지 찍혀 있어 유 이사장 주장은 사실이 아니란 게 밝혀질 수 있었는데, 이 원본이 공개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심 의원에게 ‘밀고자’란 낙인이 찍힐 뻔했다는 점에서 유 이사장의 뻔뻔함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당시 유 이사장 진술서엔 학생운동했던 학생회 간부들 이름이 등장하는데 모교인 서울대 뿐 아니라 다른 학교들까지 전부 등장하는데 유 이사장은 비밀조직을 지키기 위해 이미 노출된 사람들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너무 상세하게 기록돼 문제였다.
특히 모든 일은 학생회에서 한 것으로 진술해 다른 학내 조직들을 감추려 했다는 유 이사장의 발언 역시 공개된 원본 내용을 보면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는데, 여기엔 비단 학생회 뿐 아니라 여러 단체명과 모임명은 물론 학생운동 관련 인사 77명의 실명이 그대로 적혀 있었던 데다 심 의원은 유 이사장 진술로 당시 체포되지 않은 상태였던 18명까지 유 이사장 진술 직후인 6월 17일 지명수배 됐다고 꼬집었다.
원본이 공개되고 난 이후인 7일 유 이사장은 “진술서는 앞부분부터 다 거짓말이고 합수부 수사관들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도록 성의 있게 진술하는 게 중요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창작인지 사람들이 구분하지 못할 것”이라며 허위진술이었다는 기존 주장을 되풀이하면서도 정작 진술서 작성 시기가 자신의 주장과 맞지 않았던 데 대해선 입장을 내놓지 않았는데, 도리어 선심이라도 쓴다는 듯 “심 의원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할 생각도 없다. 이 모든 일을 학생회 간부가 다한 것으로 진술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만 이해해주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제 와서 동료를 밀고했다는 혐의에서 벗어나고자 유 이사장이 뜬금없이 40년 다 되어가는 과거사를 먼저 들춰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본인도 갖고 있지 않던 원본이 심 의원에 의해 공개된 뒤론 한 발 물러나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서 대리전을 치러주는 이상한 모양새로 흘러가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7일 페이스북을 통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유죄 판결에 있어서 핵심 법정 증언이 바로 형의 증언임이 역사적 진실로 인정되고 있다. 총학생회장이었던 형이 84년 복학해선 왜 복합생협의회장을 맡지 못하고 대의원대회의장이었던 후배 유시민에 양보할 수밖에 없었는지 스스로 잘 알지 않나”라고 심 의원을 몰아붙였고 심 의원과 대학 동기이자 당시 서울대 비밀조직 지도부였다는 유기홍 전 민주당 의원도 같은 날 “유시민은 조직을 지켰고 심재철 검거 이후 소위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조작이 완성됐다”고 주장했다.
직접 진술서 원본이란 객관적 물증을 제시한 심 의원과 달리 당시 상황을 겪은 관련자란 명분을 내세워 물증이 아닌 주장만으로 반박하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관련 법정 증언이란 별개의 부분을 꼬집어 심 의원을 압박했는데 민주당에서 유 이사장을 비호하고 싶다면 일단 제대로 설명이 안 된 유 이사장의 진술서 작성 시점 부분에 대한 해명부터 내놔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심 의원이 유 이사장을 침묵하게 한 이 물증 자체를 무력화하려는 심산인지 당시 심 의원과 같이 서울대 77학번인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까지 “그때의 자술서는 강제타술서로 자발성이 없다. 마뜩찮은 몇 줄을 찾아낸다 해도 그건 고문의 정황증거지 밀고자란 증거는 될 수 없다”며 “자술서를 어떻게 썼든 당시 학생·정치·재야운동 동향은 전두환 군부의 정보망에 이미 다 들어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그렇다면 왜 그들은 고문까지 해가며 ‘거짓 답변’이라도 얻으려 했으며 뒤늦게 추가 지명수배도 내린 건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유 이사장은 심재철 공소사실을 입증하는 검찰 참고인 진술조서를 작성한 뒤 불기소로 풀려났지만 심 의원은 기소돼 징역 5년형을 선고받았다는 데 비추어 “논쟁을 계속 이어갈 생각이 없다”면서 유 이사장은 회피만 할 게 아니라 이번 논란을 일으킨 당사자로서 결자해지의 자세로 직접 앞뒤가 안 맞았던 본인 발언에 대해 해명하고 이 불필요한 진실공방에 스스로 종지부 찍을 책임이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