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세수 준다고 수수료 면제해 달라
카드사는 위험성 때문에 수수료 면제 불가
서울 종로구에서 자취를 하는 이모씨(26)는 불만이다.
이씨는 혼자 자취를 하면서 각종 세금들을 제때 내본 적이 거의 없다. 세금을 낼 시기가 되면 빠듯한 월급이 거의 바닥나거나 갑자기 돈 쓸 일이 생기거나 은행에 가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나마 지방세는 신용카드 납부로 어찌어찌 기한을 맞춘다지만 국세의 경우 신용카드 납부마저 되지 않아 기한을 지나 붙은 가산금을 볼 때면 속상하기 그지없다. 세금을 낼 때가 돌아오면 이 씨는 생각한다.
“차라리 국세도 신용카드로 기한에 맞춰 내고 카드대금은 여유가 있을 때 내면 좋을 텐데...”라고.
매달 내야 하는 각종 세금들을 볼 때면 누구나 한번쯤 ‘신용카드로 결제 할 수 없을까’를 생각해 봤을 것이다. 그동안 말만 무성했던 국세 신용카드 납부가 일부 의원들의 관련 법안 제출로 활기를 띄고 있다. 현재 국회를 중심으로 논의되고 있는 국세 신용카드 납부. 하지만 아직 무언가를 속단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 세수 줄어 곤란
한나라당 이한구 의원 등이 국세기본법 개정안을 제출하면서 국세 신용카드 납부 문제가 다시 불거지고 있다. 이 의원 등이 제출한 개정안에는 소득세, 법인세, 상속세, 종합부동산세 등 국세를 신용카드로 납부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의원은 국세 신용카드 납부에 대해 "불의의 체납자를 최소화할 수 있으며 징세비도 훨씬 적게 들 것으로 생각 한다"고 밝혔다.
국세 신용카드의 납부는 국세청이 카드가맹점의 하나가 돼 신용카드로 물건을 사는 것처럼 전표를 긁어 국세를 납부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국세납부에 신용카드 방식이 도입되면 일시불은 물론 할부·리볼빙 등 신용카드에 쓰이는 모든 결제방식이 가능해진다. 납세자에게 국세납부의 외상·할부·차입을 허용하게 되는 것이므로 납세편의가 높아진다.
이한구 의원은 "국세기본법 개정취지는 중소기업인, 소상공인 등에게 납부 및 자금운용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며 "일부 기업이 단기간 자금압박 때문에 세금을 연체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용카드의 경우 납부와 결제기일 간 격차를 이용할 수 있어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중소기업 경우 세금을 12개월로 할부로 나눠 내면 세금납부를 위한 자금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며 당장 세금을 낼 돈이 없다면 카드사로부터 차입해서 내도된다.
문제는 수수료 부담이다.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김호성 전문위원은 이한구 의원 등이 제출한 국세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입법검토보고서를 통해 "국세납부수단으로 신용카드 결제방식을 도입할 것인지의 관건은 신용카드 결제 수수료 부담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달려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걷은 국세는 138조원. 이 가운데 30%만 카드로 결제해도 1조원에 육박하는 가맹점 수수료가 발생한다. 이 막대한 수수료를 과연 누가 어떤 방식으로 부담할지가 결정돼야 한다는 말이다.
현금납부가 원칙인 소득·법인·부가세 등의 국세를 신용카드로 납부기한 내에 낼 수 있도록 하자는 이한구 의원의 국세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여당과 정부도 취지에는 공감하고 있지만 신용카드 수수료를 정부가 부담할 경우 상당한 재정지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게 문제점으로 떠올라 있다.
재경부 관계자는 “국세를 신용카드로 내면 세금을 나눠서 내는 장점이 있지만 수수료를 정부가 부담해야 한다면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며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금감원도 최근 국세와 지방세에 대해 신용카드 결제를 허용하는 국세 기본법 개정안이 발의됨에 따라 신용카드 이용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카드사가 가맹점 수수료 책정 시 이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정부가 국세 신용카드 결제 수수료를 떠안게 되면 세수가 줄어드는 만큼 카드사가 이 수수료를 면제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금감원은 이미 지방세를 카드로 납부 받고 있는 자치단체들처럼 수수료 면제 대신 카드사들에게 실제 세금을 납입하는 시점을 한 두달 늦추는 방안을 예로 들었다. 금감원이 예로 들은 세금 납기일 연장 방식은 카드로 결제된 세금을 카드사가 실제로 국세청에 지급하는 시간을 늘려 카드사의 자금조달비용 부담을 줄여주는 것으로 현재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방세의 카드 수납 시 활용되고 있다. 세금 납기일 연장 기간 동안 카드사는 자금조달 비용의 부담을 줄일 수 있으며 막대한 세수를 운용해 수익을 확보할 수 있다.
카드사, 위험부담 커서 곤란
그러나 카드사들은 이러한 정부의 입장에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국세의 경우 지방세와 비교해 규모가 크고 카드로 결제된 국세가 연체될 경우 리스크가 고스란히 카드사로 전이되기 때문에 가맹점 수수료 면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업계의 반응”이라며 “국세의 신용카드 납부는 막대한 자금 조달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당장 적용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는 “위험이 큰 만큼 결제 영역 확대에 따른 이익도 커서 카드사들은 다각도로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다”며 “보다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A카드사 관계자도 “세금 납기일을 늦춰주면 카드사의 부담이 줄어드는 것은 맞지만 국세의 경우 지방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금액이 크고 리스크도 커져 대규모의 리스크 관리비용이 필요하다”며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문제인데 카드사에만 일방적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국세에 대해 지방세와 같은 논리를 적용해 가맹점 수수료를 면제해 주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입장이다. 국세 신용카드 납부는 정부와 납세자간의 국세채권이 카드사와 납세자간의 금전 채권관계로 전환, 결과적으로 국세체납에 대한 국가부담을 카드사가 지게 된다. 때문에 관련업계 일부에서는 많은 카드사들이 고위험성을 이유로 지방세 신용카드 납부제에도 동참하지 않고 있는데 국세는 더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또 국세에 카드 가맹점 수수료 면제라는 선례를 남길 경우 대학이나 다른 업종에서도 같은 논리로 가맹점 수수료 면제 요구가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한 자영업자는 "수중에 현금이 있을 경우에는 상관이 없지만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는 세금을 신용카드로 납부할 수 없을까에 대해 많이 생각 한다"며 "당장 돈이 없어 세금을 체납하기라도 하면 이래저래 골치 아픈 일이 많을 것 같아 눈물을 머금고 세금을 현금으로 납부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국세를 신용카드로 납부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이 통과된다고 해도 정부와 카드사간의 수수료 갈등에 또 서민들만 죽어나는 것 아니냐”며 한숨 쉬었다.
카드 사용을 권장한 정부나 카드를 발급해 준 카드사가 서로 자신들만의 사정을 이야기하며 수수료문제를 거부하는 것을 보는 국민들의 속내도 답답하기만 하다.
신용사회와 공평과세를 실현하겠다며 카드 사용을 권장하고, 심지어는 카드를 안 받는 자영업자에게 세무조사 운운하며 압박해온 정부가 정작 자신들은 카드를 받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도 적지 않다. 수수료가 커도 자신들이 국민에게 한 말을 지키려는 모습을 보여줘야 국민도 정부를 신뢰할 수 있지 않겠냐는 것.
또한 ‘위험하다’는 이유로 국세 카드납부를 거부하는 카드사들에 대해서도 눈초리가 곱지만은 않다. 카드를 만들라고 부추길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발을 빼려하냐는 비난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국세기본법 개정안에 대해 재경부, 한은, 국세청, 금감원 등 관계기관들은 개정안 도입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고, 입법과정에 따라 오는 4월께 입장을 확정한다는 방침이다. 이 과정에서 바라 마지않는 것은 “제도 도입 시 징세비용, 즉 신용카드 수수료 부담으로 상당한 재정지출이 필요하다”며 “국가의 수수료 부담은 결과적으로 납세자의 부담으로 귀착될 것”이라고 말한 국회 재정경제위원회 김호성 전문위원의 지적이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국민, 아무도 책임 안 져 곤란!
국세 신용카드 납부 문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정부와 카드업계 모두가 수수료 문제를 은근슬쩍 국민의 부담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국민의 분노가 어디로 향할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