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의 그림자 권노갑의 옥중 반란?
DJ의 그림자 권노갑의 옥중 반란?
  • 김상미
  • 승인 2002.08.20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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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씨와 친형제처럼 지낸 Y씨 권 씨 삶에 있어 동반자와도 같은 Y씨. Y씨는 스스로를 가리켜 “형님에게 있어 친동생과도 같고 둘도 없는 친구와도 같았다”며 “늘 그와 함께 삶과 인생을 나누었다”고 말했다. 또한 “때론 서로 다른 정치적 노선을 걷기도 했지만 인간적인 관계만큼은 서로 저버릴 수 없는 절친한 관계였다”고 덧붙였다. 그는 감옥에 있는 권 씨에 대해 “억울하다”고 서두를 부치며 긴 이야기를 풀어냈다. 부유했던 권 씨의 유년시절 권노갑 씨의 아버지는 권치삼 씨로 원래 고향은 경상북도 안동이었다. 결혼을 하고도 아이가 없었던 권 씨 부모는 용하다는 점쟁이의 말대로 전라도 목포로 이사했고 아이를 낳기 전까지는 대구에서 살았다. 점쟁이의 말대로 목포로 이사한 후 사업도 더 번창했고 그렇게 고대하던 아들도 낳았다. 그 아이가 바로 민주당 전 고문인 권노갑 씨이다. 안동에 살 때도 이름난 부자였지만 목포로 이사해서도 권 씨 네는 더 없는 부유함을 누렸다. 그 옛날 굶기를 밥먹듯 하던 시절도 권 씨는 소고기 장조림을 매일 먹을 정도로 풍요로웠다. 그 부유함 속에 권 씨가 성장했고 머리가 좋았던 권 씨는 급기야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입학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권 씨가 세 살 때 유명을 달리했다. 호랑이같이 엄격한 어머니 키가 작았던 어머니! 그러나 모든 면에서 결코 작지 않았던 그의 어머니였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빈자리를 의식해서인지 교육에는 매우 엄격했고 단호한 호랑이 같은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목포에서 가장 큰 기름공장을 운영했다. 공장은 늘 사람들로 꽉 찼고 공장에서 얻어지는 수입 또한 엄청났다.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얻어지는 돈’이라고 여겼던 어머니는 기름을 짜서 직접 머리에 이고 시장에 내다 판 돈으로 권씨의 학비를 마련했다. 어머니는 그렇게 당신이 고생해서 번 돈이래야 자식을 위해 공들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권 씨의 교육이라면 유별나고 남달랐던 어머니였다. 특히 권 씨가 거짓말이라도 하면 “애비 없는 자식이 거짓말까지 한다”고 회초리가 부러질 정도로 때렸다. 그의 어머니는 권 씨가 거짓말 하는 것을 가장 용서하지 않았다. 혹 친구라도 거짓말을 하거나 권 씨와 잘못된 일을 저지르면 용서치 않고 회초리를 들었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기름공장은 연일 사람들로 분볐다. 기름을 짜러 온 고객들과 허기를 채우려고 줄을 서는 동냥꾼들로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는 권 씨를 보고 오는 친구들과 선후배들도 많았다. 가끔 가깝게 사는 부유한 권 씨의 친구들이 밥을 먹을 때면 어머니는 그들을 용서하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인 너는 배곯을 일이 없으니 냉큼 숫가락을 내려 놓으라”고 호통을 치셨다. 집이 가깝고 부유하다는 이유때문이었다. 권 씨의 어머니는 그렇듯 사리가 분명한 분이셨다. 그렇게 호랑이 같이 철저한 어머니의 모성으로 권씨는 교육받았다. 운동과 인간관계라면 TOP 권씨가 상업학교(목포공립상업학교) 2학년 때 해방됐다. 권 씨는 남다른 운동신경을 갖고 있었다. 유도 야구 농구 검도 권투 등 거의 못하는 것이 없는 만능 스포츠맨이었다. 해방 후에도 권 씨는 권투를 했다. 그의 실력은 대표선수를 할만큼 수준급이었다. 그는 가르치는 데도 소질이 있었다. 이 글의 말머리를 풀어내는 권 씨의 후배 Y씨는 키가 작고 몸집이 작은 체구이다. 그런데도 권씨가 코치를 하면 아무리 강한 상대를 만난다 해도 반드시 이기는 게임을 했다. 그렇게 권 씨는 상대방을 파악하고 그에 따른 철저한 훈련을 하고 전략과 전술을 쓸 줄 아는 코치였다. 그는 승부에 있어 ‘우연’을 싫어했다. 특히 권 씨가 싸우는 데는 원칙이 있었다. 그 보다 약자나 어린 사람하고는 절대 싸우지 않았다. 권 씨보다 나이가 많고 강한 사람하고만 상대했다. 그리고 그는 반드시 이겼다. 그는 모든 운동도 잘 했지만 특히, 두루 원만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나이를 막론하고 권 씨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Y 씨도 권 씨를 따르던 추종자의 무리 중에 하나였다. 솔직한 성격의 권 씨 권 씨의 진면모를 드러내는 일화가 있다. 권 씨가 대학 입학을 준비할 때였다. 어느날 갑자기 권 씨는 절친한 후배인 Y 씨를 조용히 불렀다. 느닷없이 권 씨는 “부정사용법을 아냐”고 묻는 것이었다. “형은 그 것도 모르냐”라고 Y 씨가 핀잔을 줬지만 권 씨는 전혀 동요치 않았다. 권 씨는 그렇게 솔직하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고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는 솔직한 성격이다. 영어를 나이 어린 Y 씨에게 물어 보는 것도 권씨의 솔직 담백한 성격 탓이다. 권 씨의 그러한 성품도 호랑이 같은 어머니 의 교육 탓이라고 Y 씨는 말한다. 오히려 권 씨는 쉴 새 없이 찾아오는 사람들을 따돌려 달라고 Y 씨에게 부탁하고 골방에 들어앉아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다. 사실 연일 권 씨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공부할 틈이 없었다. 그렇게 1년 동안 열심히 공부에만 몰두해서 영어는 3등 안에 들 수 있었다. 영어를 잘했던 탓에 권 씨가 꼭 가고 싶었던 연세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입학 추천서를 받았다. 권 씨가 부푼 꿈을 안고 연세대에 추천서를 내려고 했을 때 ‘인연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겼다. 추천서를 목포 집에 두고 온 것이다. 마감날인 데다가 목포까지 다시 가기는 꼬박 12시간 걸리는 하룻길이었다. 그러나 다 지나서야 자신이 들고 온 가방 속 밑바닦에 가지런히 깔려 있는 추천서를 보고 털썩 주저앉았다. 권 씨는 자신이 간절히 꿈꿔왔던 연세대와는 인연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권 씨는 서울대보다도 더 가고싶었던 연세대 입학의 꿈을 접었다.(동국대 경제학과 졸업) 권 씨와 DJ의 만남 권 씨와 DJ는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다. DJ는 목포공립상업학교에서 특출난 인물이었다. 목포공업상업학교는 당시 일류에 속하는 실업학교였다. 그러나 2차대전 종전 무렵 목포공립상업학교보다 조금 뒤떨어지는 송정리공업학교와 통합되어 목포공업학교로 개명됐다. 그러다 해방과 함께 목포공립상업학교가 위상을 들고 독립을 선언했다. 학교가 다시 나뉘면서 선생들의 거취도 ‘어느 학교로 가느냐’에 혈안이 되었을 때였다. 학교가 싸움으로 뒤범벅되었다. 이 때 소방차를 타고 영웅처럼 나타난 목포상고 선배가 있었다. 그는 바로 지금의 김대중대통령(DJ)이었다. 당시 DJ는 “지엽적인 문제로 싸우지 말라. 학교 문제로 싸울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전교 재학생의 눈길을 한 몸에 받았다. 당시 DJ는 권씨보다 목포상업학교 5년 선배였다. DJ는 청년시절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권 씨도 당시 청렴한 정치인의 대표적 인물이자 고무신을 즐겨 신던 국회의원 장홍엽을 존경했다. 그는, 특히 김 구를 존경했다. 김 구 사망시 권 씨는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권 씨는 영어를 잘해 미국계 회사에 취직을 했다. 당시 월급쟁이들의 평균 봉급이 1만원 받았는데 권씨는 월 6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군인인 친구가 특수기관원에게 총을 쏘는 바람에 권씨가 회사를 사임하게 되었다. 전쟁직후라서 당시 직장은 제2의 생명과도 같았다. 친구를 더 소중히 했던 권 씨의 인간적인 면모는 거기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권씨가 DJ를 만났을 때는 벌써 그는 국회의원 선거에서 4번이나 낙선한 상태였다. 그로인해 DJ의 가정 형편은 매우 불안정했다. 그 즈음 그의 전처인 차 여사도 사망했다. DJ와 권 씨는 서로의 목적에 따라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권 씨가 DJ를 모시고 목포 선거운동에 나섰다. 목포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DJ는 깜짝 놀랐다. 목포 사람들이 모두 권 씨를 보고 나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반갑게 시종일관 인사를 하는 것이다. DJ는 보다 못해 권 씨에게 “내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한 것이 아니라 자네가 출마자 같네 그려”하고 감탄을 했다한다. 그렇게 해서 DJ는 6대 국회의원에 당선이 되었다. 주위사람들은 권 씨 때문에 DJ가 당선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1등 공신인 권 씨는 차석에 불과한 DJ 비서 였다. 당시 DJ의 수석비서관은 조길환 씨였다. 권 씨는 잠시 목포 여학교의 영어선생을 하기로 결심했다. 권 씨는 DJ와 함께 승리감을 맛보지 않고 목포에 남아 있다가 나중에서야 뒤늦게 상경하여 DJ 비서관으로서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단행했다. ‘책’ 선물을 가장 좋아하는 권 씨 Y 씨는 “권 씨가 좋아하는 선물은 ‘돈’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책’ 선물 받는 것을 권 씨는 가장 좋아한다고. 권 씨는 부유하게 성장했다. 돈에 대해서는 더 이상 원이 없을 정도로 넉넉했다. 그런 권 씨가 지금 5천만원 때문에 감옥생활을 하고 있다. 그의 가장 가까운 후배 Y 씨는 권 씨를 믿는다. 권 씨가 “안 받았다”고 하면 “안 받은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는 권 씨를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또 Y 씨는 “형님은 ‘벤처가 뭔지도 잘 모르는데 내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느냐’고 말했다”며 “형님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모른다’고 말하는 솔직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성장배경과 그와의 동고동락 속에서 바라본 그대로다. 그는 이어 “받지 않은 5천만원을 ‘줬다’고 뒤집어 씌우지 말라. 그는 매우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주장했다. “할아버지는 ‘부패의 몸통’이었느냐?” 또한 그는 “형님이 감옥에 가기 전 ‘해외에 갈 것을 권유받았다’고 말했다. 형님은 ‘가지 안겠다’고 답했다”고. 그것은 권 씨가 처음으로 DJ 명령을 거부한 사례였다. 형님이 해외에 안 간 이유는 미국에 사는 아들의 질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들이 형님에게 묻기를 ‘아버지 이제 당신 손주가 생겼습니다. 나중에 제 아들이 커서 저에게 할아버지는 ‘부패의 몸통’이었느냐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답변을 할까요?’라는 질문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때 형님 스스로 ‘이 거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히고 안 가게 된 것”이라고. 또다른 이유는 “자신 때문에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굳건하게 버텨준 사랑하는 아내 때문”이라고 한다. “아내야말로 정치적 희생양이었다.” “그의 아내는 경기여고 이화여대 미국 유학에서 얻은 소중한 친구들이 많았다. 그 많던 친구들과 정치적 구설수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아내는 냉정하게 교제를 끊고 오직 남편과 가정만을 위해 집을 지켰다.” “남편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접어둔 아내를 정치적 폭풍우에 휘말리게 하는 비참함 속으로 더 이상 방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 씨는 그보다 더 참혹한 자신의 미래 때문에 DJ의 명령에 불복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DJ가 떠난 빈 껍질 속에서 촉수도 잘린 채 붕어처럼 입만 뻑금거리는 비참한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다. 이어 Y 씨는 “형님은 정말 강한 분이시지만 나를 만나 어머니 얘기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정말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고 “구속되기 전 유난히 어머니 얘기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모주간지에 게재된 L의원의 말을 인용했다. “형님이 구속될 때 ‘나더러 ‘장세동’이 되라고 하는 건가’... 형님은 당신 아들의 질문에 스스로 답을 얻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본인이 ‘안 받았다’는데 심리적 근거만 가지고 실형에 처한 것은 법치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법과 원칙이 무너진 부패한 정치권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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