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리뷰]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영화리뷰]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
  • 이문원
  • 승인 2004.06.17 10: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키치와 장르성 사이,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소녀검객 아즈미 대혈전>(이하 <아즈미>)을 바라보는 시각은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먼저, '만화의 영화화'라는 측면에서 화면구성의 만화적 요소와 간략화된 인물 설정, 요란스런 의상 디자인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사무라이극의 전통'이라는 측면에서 이른바 '짠바라 액션 연출'이 어떤 식의 진화하고, 또 전통을 지키고 있는지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근래 들어 양산되고 있는 '일본형 블록버스터'라는 측면에서, 영화에 쓰인 여러 특수효과 기술과 방대한 물량투입, '흥행공식'을 철저히 고수하는 자세 등을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즈미>를 진정으로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으며, 그것은 새롭게 유행하는 '작가적 성향' - '작가주의'에도 유행이 있다는 사실은 참 기이한 일이다 - 인 '키치'적 자세와 장르에 대한 맹목적 애정을 표출하는 단단한 '장르성'과의 절묘한 균형에 대한 문제일 것이다. <아즈미>를 연출한 기타무라 류헤이의 1988년작 <버수스>는 분명 '놀랄만한' 영화였다. 아나키즘의 극단을 달리는 황당무개, 잔혹무도의 연출방식도 그러했지만, 무엇보다 동류의 '포스트-장르' 영화들이 흔히 '젠 체 하는' 태도를 보이며 '광란=지성'이라는 입장을 열심히 어필 - 츠카모토 신야의 <철남>이 대표적이다 - 했던 것과 달리 순수하게 '미친 검투극'의 복잡다단하고 구역질나는 양상만을 추적하여 묘사한 <버수스>는 피터 잭슨의 데뷔작 <고무인간의 최후> 이래 가장 신선한 충격이었으며, 기타무라 류헤이라는 작가의 신비성을 오히려 상승시키는 효과를 낳기까지 했다. 그 뒤를 이은 변종 SF <얼라이브>(2002)와 <아라가미>(2003) 역시 완성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방향성만은 <버수스>의 그것을 따라 그의 고정팬층을 꾸준히 만족시켜 왔는데, 그의 최신작 <아즈미> 역시 이런 '순수성'을 살려내는 작업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인다. <아즈미>는 놀리고, 비꼴 만한 요소가 넘쳐 흐르는 소재를 지니고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추종자들을 '천하의 평화'를 위해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는, 그닥 설득력이 없는 기본 전제에, 얼핏 미니스커트처럼 보이는 소년 의상을 입은 동그란 얼굴의 소녀가 망토를 휘두르며 검투극을 벌인다는 만화적인 설정, 클리셰의 극단을 달리는 '열혈성' 대사들이 넘실대는 <아즈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요소도 비웃지 않고, 잘난 척하듯 '유치한 요소'들을 깔아뭉개지 않으며 이를 '장르성'의 큰 틀 안에서 여유있고 자연스럽게 아우르고 있다. 설정 자체의 우스꽝스러움에서 눈길을 돌리게 하기 위해 얼핏 어울리지 않을 법한 '개그 조연'들을 등장시켜 직격적인 웃음을 자아내게 하고, 열혈적인 상황에 멜랑꼴리한 음악이 연속되면서도 연출과 연기패턴을 극단적인 처절함으로 이끌어 상황의 무게에 고식적인 형식이 오히려 빛을 발하도록 조정시켜 놓는 등의 아이디어를 통해, <아즈미>는 반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순수한 형태의 자기 본 모습을 지켜낼 수 있었다. <아즈미>에서, 키치적 요소는 더 이상 키치가 아니며, 장르성은 무겁고 고매한 '절대법칙'이 아니라 즐겁고 유쾌한 '상용구'이다. 이렇게 '모두가 즐거운' 방향성이 있는데, 왜 모두들 '놀리려', '놀림을 통해 자신의 지성을 표출시키려' 애쓰는 것일까? <아즈미>는 물론, 이 밖에도 칭찬할 만한 부분이 많이 있는 영화이다. 먼저 기타무라의 영화들 중 가장 탁월한 완성도를 지니고 있는 영화로 꼽을 만한데, 중반 이후부터는 영화의 광적인 성격에 질려버렸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잘 짜여진 완급조절로 128분의 다소 긴 상영시간을 완숙하게 '처리'해내고 있으며, CG를 이용한 신감각의 액션 장면과 오래된 '짠바라 형식'을 따르는 액션 장면이 잘 조화되어 '장르의 진보'가 이상적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그리고, 라스트의 '대혈전'은 쿠엔틴 타란티노의 <킬 빌 Vol. 1>과 함께 최고의 '대량학살 장면'으로 꼽힐 법한, 탁월하게 구성된 명장면이다. 모든 영화에는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목적과 관계없이,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형식'이 따로 존재하고 있다. <아즈미>는 작가의 목적과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형식이 모두 '순수한 영화보기의 즐거움'이라는 점에서 명확한 일치를 이루고 있는 영화이며, 쉽게 얻어낼 수 있는 '개성' 대신, 좀처럼 이룰 수 없는 '무개성'을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된, 특이한 케이스로 기억될 법하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