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판문점에서 미북정상회담이 끝나자마자 일본이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를 전격 단행하는 등 최근 우리나라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긴박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정부의 태도는 의도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줄곧 수동적인 태도로만 대응하고 있어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다.
당장 내년 11월 3일 치러질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그간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대선후보들에 밀리고 있던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지난달 26~27일 열리는 민주당의 첫 경선후보 토론회 직후인 29~30일 한국을 찾아 북핵 해결의 실질적 진전보다 김정은과 판문점에서 만나는 ‘깜짝 쇼’로 자국 여론을 뒤집는 데에만 집중했음에도 정작 북핵 위협을 받는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국가원수란 문재인 대통령은 회담 성과보다는 내내 트럼프의 ‘쇼 연출’에 부화뇌동하는 모습만 보여줬다.
지난 하노이 회담 파탄 이후 서먹해졌던 미북 양측이 본격 실무 협상에 돌입하겠단 선언 외엔 이번 판문점 회담에선 북핵과 관련해 그 어떤 진전도 없었지만 우리 안보를 미국 선거판에 이용되는데 내맡겨놓고도 마치 업적이나 된다는 양 문 대통령은 지난 2일 국무회의에서 “북미 간 사실상 적대관계의 종식”이라고 성급한 자화자찬까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자고로 대한민국 대통령이라면 우리 안보를 자신의 선거용 정치쇼로나 이용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을 오히려 적극 설득하면서 완전한 비핵화 방향으로 가도록 유도하는 자세가 당연히 필요한데, 반대로 문 대통령은 조연을 자처하며 트럼프와 김정은의 ‘평화쇼’를 보여주는 데에만 치중했을 뿐 미국이 북핵 동결로 한 발 물러나고 있는 지경인데도 이를 잘 되어간다는 듯 그저 좌시하고 있다.
게다가 적대관계의 종식이라던 문 대통령의 호언이 무색하게 북한은 판문점 미북정상회담이 끝난 지 고작 사흘 뒤인 3일 주유엔 북한대표부를 통해 미국을 비난하는 성명까지 내놓고 있는 상황인데 ‘평화가 왔다’고 그토록 극찬하던 청와대는 이에 대해 과연 뭐라 해명할 것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도리어 북한과의 비핵화 협상이 진행되어온 작금의 경과를 반추해보면 문 대통령은 비핵화 여부나 우리 안보 상황보다 오로지 자신의 지지율이나 선거 전망이란 정치적 시각에만 매몰된 위험한 발상을 하고 있는 게 아닌지 상당히 의심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6·13지방선거 하루 전에 열렸던 싱가포르 미북 정상회담을 꼽을 수 있다.
빛 좋은 개살구나 다름없던 당시 회담은 별 성과는 없었음에도 현직 미국 대통령과 북한 정상 간 최초의 만남이란 부분에만 관심이 쏠려 다음날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압승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당시 구청장 선거에 출마했던 본인 역시 ‘싱가포르 이벤트’ 때문에 하루아침에 지지율이 역전되어버린 기억도 있어 문 대통령이나 트럼프 대통령 모두 북핵문제를 자신의 정치적 돌파구 정도로나 여기는 게 아닌지 심히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월말 자신의 변호사인 마이클 코언이 미국에서 열린 러시아 스캔들 관련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와 정치적 위기에 몰렸던 상황에서 김정은과 마주한 하노이 정상회담을 현장에서 전격 깨버리는 ‘노딜’이란 초강수로 언론의 관심을 돌리는 반전을 이뤄낸 적도 있어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수차례 “서두를 것 없다”고 강조하는 그의 발언도 결국 완전한 비핵화 의지를 시사한다기보다 미국 대선까지 끌고 가겠다는 정치적 계산에 방점을 둔 게 아니냔 생각이 든다.
중대한 안보사안을 정략적으로나 이용한다는 이런 부분에 있어선 판문점 회동 직후 50%대 지지율을 회복했다는 문 대통령도 마찬가지인 듯 싶은데, 트럼프 대통령과 이심전심으로 묵계라도 있었는지 이번엔 조연으로 물러나 있던 그가 내년 총선 직전엔 ‘김정은 서울 답방’과 같은 이벤트의 주연으로 전면에 나서는 게 아닌지 벌써부터 우려될 정도다.
이 같은 문 대통령과 트럼프의 정치 쇼를 보고 느낀 게 있는지 급기야 아베 일본 총리까지 최근 우리나라를 오는 7월에 있을 자국 참의원 선거판에 이용하려고 뛰어든 모양새인데, 일본은 참의원 선거운동 시작일인 4일부터 포토레지스트, 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등 우리 주력산업인 반도체·스마트폰·TV 생산에 사용되는 필수 소재이면서 대일 의존도가 큰 3가지 품목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전격 단행했다.
이미 지난해 10월 일본 전범기업들이 강제 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우리 대법원의 판결에 반발해 11월 “모든 선택지를 시야에 두고 대응하겠다”고 벼르던 일본 정부는 야심차게 준비한 오사카 G20 정상회의마저 뒤이은 판문점 미북정상회담으로 덮여버렸기 때문인지 자국 부품·소재 기업들의 타격까지 감수하고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기 위해 ‘한국 때리기’ 카드를 던졌는데, 오는 8월에는 군사전용 가능성이 있는 품목에 대한 허가 신청을 면제해주는 ‘화이트 국가’에서 한국을 제외하겠다고 추가 제재 조치까지 예고하고 있다.
불과 며칠 전 ‘자유롭고 공정하며 무차별적인 무역’을 기조로 한 G20 오사카 정상 선언문을 주도했던 게 무색하다는 국내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아베 총리는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강변하면서 철회 의사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 현재 우리 정부는 바세나르 체제 등에 위배되는 행태라고 반박하면서 주요 소재·장비 국산화 등 강경하게 맞설 뜻을 밝히고 있지만 대부분 당장 대체하기 어렵다보니 사태가 장기화된다면 경제적 타격은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번 조치가 참의원 선거 승부수로 단행됐다는 실질적 배경은 차치하더라도 “징용공 문제라는 것은 역사문제가 아니라 국제법상 국가와 국가의 약속을 지키느냐는 것”이란 3일 아베 총리의 일본기자클럽 토론회 발언에 비추어 일단 표면상으론 지난해 10월 우리 대법원의 강제 징용 배상 판결이 원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전 정권에서 체결된 한일 위안부 합의를 놓고도 현 정권 출범 이후엔 일본 측과 불협화음이 일어났던 만큼 뒤이어 강제 징용 배상 판결까지 나오자 그간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배상 문제가 종결됐다고 보던 일본 정부에선 아예 제재조치란 강경대응 쪽에 무게를 싣게 된 것으로 관측되는데, 우리 정부가 북한 비핵화 회담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 미칠 문제를 마치 남 일 인양 낙관하면서 안이한 자세로 방조했던 게 아닌지 아쉬울 따름이다.
과거 한일청구권 협정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대해선 여전히 양국 간 인식 차가 상당하더라도 당시 한국 GDP(30억불)의 10%에 해당하는 3억불의 무상자금과 2억불의 유상자금을 받았던 것은 사실이니 지난해 대법원 판결 후 전범기업 자산 압류 등으로 사태가 치닫기 전에 어찌 됐든 청구권 협정을 맺었고 일본으로부터 자금을 받았었던 정부에서 개인 배상 문제 해결에 나서는 게 순서 아니었나 생각한다.
또 이렇게 일이 터지고 나서야 사후약방문격으로 국산화 운운하는 정부 대응도 문제라지만 그간 주요 현안을 정치적으로만 바라보는 현 정부의 행보에 비추어 자칫 사태를 방조했다는 책임을 추궁 당하게 될까봐 앞으로 현 상황을 풀어나가기보다 반일감정을 부추겨 대결구도로만 몰고 가려는 악수를 두려는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남의 나라 정세를 자국의 선거판에 이용하려는 외국 정상들의 행태도 비판하지 않을 수는 없으나 이걸 막기는커녕 우리나라 일인데도 어떻게든 정치적으로 활용해보고자 하는 한심한 작태는 부디 우리나라 정부라면 지양해 줄 것을 이 자리를 빌어 재삼 요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