갖가지 양상으로 나뉘는 아시아 영화 강국들의 달라진 트렌드
'헐리우드 영화의 장악력이 약화되었다'는 이야기는 이제 '추측'이나 '분석'이 아닌, 직접 우리 피부로 느껴지는 '현실'이 되어버렸다. 헐리우드 영화가 쥐고 있던 영화산업의 헤게모니는 전세계로 분산되어, 그간 '압제'에 시달리던 각국은 각자의 '색깔'을 되살리며 자국 흥행은 물론 해외로의 진출까지도 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아시아 국가의 영화 산업 약진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일본은 재패니메이션으로 유럽시장을 제패하고 미국에까지 상륙했으며, 홍콩은 1990년대 후반부터 밀어닥친 자국영화 부진을 서서히 씻어내고 있는 와중, 세계 최대의 영화산업국으로 불리우는 인도도 '인도영화 스타일'을 혁신하고 서서히 세계시장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물론, '21세기 세계영화계 최대의 화두'인 한국영화 역시,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의 잇따른 수상과 함께 점차 세계시장 석권을 위한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우리 영화의 대약진에 열광하여 그간 돌아보지 못했던 여타 아시아 영화 강국들의 달라진 영화풍토를 살펴보고, 아시아 영화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생각해보기로 하자.
<일본> - '실사영화'가 다시 관객을 끌어모은다
일본은, 누구라도 아는 것처럼, 애니메이션 강국이다. 비록 해외에서는 <드래곤볼>과 <포켓몬스터> 등 'TV용 애니메이션'의 위력만을 체감하고 있는 실정이지만, 자국 내에서는 극장용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이 전체 영화산업을 이끌고 있다 보아도 과언이 아닌데, 1979년, TV용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극장판
이 애니메이션 사상 최초로 그 해 통산 흥행 1위에 등극하고, 10년 뒤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녀 우편배달부>가 다시 같은 위치를 차지한 이래, 극장용 애니메이션은 가장 확실한 흥행 보증수표이자 부대사업까지 챙길 수 있는 '알짜배기 장삿감'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 일례로, 1995년부터 1999년까지의 일본 영화 흥행 톱 5를 살펴보면, 총 25편의 영화들 중 12편이 애니메이션임을 알 수 있고, 이들 대부분이 '만화' 원작이자 이미 'TV용'으로 제작된 애니메이션의 장편화라는 점을 생각해볼 때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산업은 '출판-TV-극장-비디오'에 이르는 문화산업 유통망 전체를 장악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지난 해의 일본 영화 흥행은 조금 남다른 데가 있었다. 물론, 한 해 통산 흥행 톱 5에는 애니메이션도 2편 들어있어 그 '파워'가 여전함을 알 수 있었지만, 1위를 차지한 'TV 드라마 출신' 극장판의 속편 <춤추는 대수사선 2>와 2위를 차지한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 2003>과의 흥행 수입 격차는 거의 4배에 이르렀다. 국내에서도 좋은 반응을 얻은 쿠사나기 츠요시, 다케우치 유코 주연의 <환생>이 거둔 성공 역시 주목할 만하다. 카지오 신지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TV 시리즈의 인기'를 등에 업고 제작되는 일본 실사 영화의 '흥행 수순'을 깨고 스타 파워와 이야기의 참신함, 탄탄한 연출력만으로 승부하여 성공한 경우이기에 자생력 부진의 일본영화계로서는 상당히 고무적인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난 해는 현재 일본영화계에서 가장 세계적인 작가로 꼽히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해이기도 하다. 그의 신작 <자토이치>는 '기타노의 영화는 자국내 흥행에 실패한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가 되었는데, '상업적 가능성도 충분한 작가주의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온 기타노가 마침내 관객들의 호응을 얻어낸 일은 기타노 개인으로서나 일본 영화 산업 전체를 돌아보았을 때에도 대단한 '희소식'으로 여겨지고 있다.
물론, 일본의 실사 영화가 '완전한 오리지널'로서 흥행에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앞서 언급한 <환생>의 경우도 그러하고, 최근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역시 250만부가 팔려나간 베스트셀러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2002년의 <냉정과 열정 사이>도, 큰 파문을 일으킨 <실낙원>도 마찬가지의 경우. 다만, 일본인들의 '펫-매니악' 기질을 흥행요소로 삼은 몇몇 '동물 영화'들만이 오리지널리티를 보유한 채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정도이며, 1997년 <모노노케 히메> 이전까지 일본 영화 역대 흥행 1위 기록을 보유하던 <남극 이야기>(1983)나 올해 등장한 '맹인견' 영화 <퀼> 등을 그 예로 들 수 있는데, 비록 실사 영화가 애니메이션과 승부할 만한 위치에 오르긴 했어도 'TV 시리즈 원작', '소설 원작', '만화 원작', 혹은 '동물 영화'가 아니면 여전히 흥행이 힘들다는 점은 당분간 고질적인 문제로 남게 될 듯하다.
<홍콩> - 여전히 '구정영화'와 '프랜차이즈' 중심...그래도 살아나고는 있다!
지난 10년 간 문화적 영향력이 가장 폭락한 영화대국을 꼽는다면, 어쩔 수 없이 홍콩 - 정확히 말하자면, '국가'라 할 수는 없지만 - 을 들어야만 할 듯.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10여년 간 아시아 영화를 대표하며 '아시아의 헐리우드'라 불리웠던 홍콩은 언제부턴가 소재의 빈곤과 얄팍한 상술에 휘말려 인기를 잃어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불법 CD의 대대적인 유통이 이루어져 산업적 자생력이 심각하게 떨어지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그러나 2000년대에 이르러 두기봉, 위가휘 콤비의 <니딩 유>(2000), 주성치의 <소림축구>(2001), 맥조휘-유위강 콤비의 <무간도> 등, 이전의 홍콩 영화와는 궤를 달리하는 블록버스터 수작들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홍콩 영화는 새로운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홍콩 영화'를 지탱하는 두 축인 '구정영화'와 '프랜차이즈'만은 떨쳐 버릴 수 없는 듯하다. 지난 해 통산 흥행 1위와 5위를 차지한 영화는 2002년의 대히트작 <무간도>의 3편과 2편이었으며, 4위에 6위에 각각 랭크된 <행운초인>과 <백년호합>은 '구정영화'로 기획된 영화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1990년대에 비해선 발전된 양상을 엿볼 수 있어 다소간 희망적인 비젼이 제시되고 있다. <무간도> 프랜차이즈는 홍콩이 수없이 양산해낸 무의미한 속편 형식에서 크게 벗어나, 마치 <반지의 제왕>이나 <매트릭스> 프랜차이즈처럼 '미리 계산된' 형식의 3부작으로 제작되어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나 대중들의 호응도 면에서 모두 합격점을 받아냈고, '구정영화'로 등장한 곡덕소(<주성치의 007>, <성룡의 빅 타임>)의 <행운초인>의 경우, 가족 간의 화합을 공통된 주제로 삼던 기존의 '구정영화' 공식에서 벗어나, '구정'이라는 중국 명절에 어울리는 '풍수'와 '점술사' 소재의 로맨틱 코미디를 개발하여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이 밖에 주목할 만한 흥행 성공작이라면 임초현 감독, 정이건 주연의 '흡혈귀' 영화 <트윈 이펙트>와 두기봉-위가휘 감독, 유덕화, 장백지 주연의 <대척료>를 들 수 있다. <트윈 이펙트>는 '강시영화'로 대표되는 홍콩의 호러 블록버스터에 흡혈귀라는 서구적인 개념을 끼워넣어 다분히 헐리우드적 감수성으로 펼쳐낸 코미디-호러-액션 영화로써, 비록 완성도는 기대에 못 미쳤지만 천편일률적이던 홍콩 영화의 소재 확대 차원에선 고무적인 성과를 거뒀다 평가되고 있다. 현재 홍콩에서 가장 바쁜 연출팀인 두기봉-위가휘 콤비 - 이들은 2003년 한 해 동안에만 3편의 영화를 만들어냈다! - 의 <대척료> 역시, 동양주술적인 소재와 격투 액션 형식을 뒤섞어 기묘한 종류의 신종 장르를 개척해낸 케이스인데, 이런 독특한 시도가 크게 평가를 받아 올해 금상장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거두기도 했다. 이들 '신 장르' 영화들이 소재 발굴 차원 이외에도 주목받아야만 하는 이유라면, 전통적으로 자국 영화가 강세인 구정과 크리스마스 시즌에 성공한 케이스가 아니라, 헐리우드의 점령기로 흔히 파악되는 여름 시즌에 성공을 거둔 영화들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한편에선, 드디어 헐리우드 영화와 승부할 수 있는 발판이 마련되었다는 성급한 평가가 나오고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자국 영화의 시장점유율이 심각하게 위축되어 있는 홍콩영화계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다고 볼 수 있다.
<인도> - 더 이상 춤추고 노래하지만은 않는다
인도 영화에 대해 냉정하게 말하자면, 한 편을 보면 10편을 본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모든 영화가 '마살라', 즉 노래와 춤을 곁들여진 '뮤지컬' 스타일로 제작되어 있고, 별다른 사회적 이슈나 인간 탐구도 하지 않은 채, 오직 흥겹고, 가벼운 분위기의 '희극'만을 계속해서 양산해내고 있기 때문.
그러나 이런 고정된 트렌드 혹은 '불변법칙'이 마침내 깨어지기 시작했다. 한 정신지체 소년이 외계인과 접촉하게 된다는, 인도 영화라고는 믿기 힘든 '참신한' 소재의 <코이 밀 가야>는 뮤지컬 형식에 기대지 않고 오직 드라마로만 승부했음에도 지난 해 최고의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대학생들의 삼각관계를 다룬 로맨틱 코미디 <이시크 비시크> 역시 노래와 춤 없이, 그리고 인도영화 흥행을 판가름 짓는 '스타'의 존재없이 큰 성공을 거두어 인도 관객들의 달라진 영화 취향을 보여주었다.
물론 기존의 '마살라' 스타일 영화들이 급작스럽게 인기도가 떨어진 것은 아니며, '샤 루 칸'과 '프레이티 진타' 등 대스타들이 출연한 <칼 호 나 호>나 <바그반>, <영웅> 등의 '마살라' 영화들이 여전히 연말 통산 흥행 순위의 상위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점차 분위기가 바뀌어가고 있다'는 인상이 현재 인도 영화계에 깊이 각인되어 있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 점차 떨어져가던 관객 점유율 - 특히 2002년은 전년도에 비해 6000만 달러 이상의 전체흥행수익 감소를 보여주었다 - 에 제동을 걸고, 다시금 영화산업을 부흥시키게 된 계기가 바로 '노래하고 춤추지 않는 영화'들이었음에 많은 이들이 주목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렇듯 자국 내에서 '쇄신'의 바람이 불고 있을 시점에, 전세계가 드디어 '마살라' 영화 참맛 - 대부분의 국가에선 '컬트'적인 반응으로 인기있는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 을 알고, 수입추진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대단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는데, 이런 연유로, 인도가 여러 아시아 국가들 중 가장 고민되는 영화산업을 안고 있는 나라임은 부정하기 힘들 듯하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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