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회 '인간상록수'에 공동추대된 이육주 경산대학교 재단이사장
지난 5월 29일에 열린 '제 17회 인간상록수 추대식'에는 새롭게 '인간상록수'로 추대된 한양원 한국민족종교협의회 회장과 함께, 자그마한 체구의 조용한 할머님이 앉아있었다. 할머님은 답사를 발표하기 위해 연단으로 나와, "나 같이 무식한 사람이 이런 명예를 얻게 되다니, 이게 진짜인지 누가 장난하는 건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의심스러웠다"며 겸손한 자세를 보여주었는데, 이야기가 점차 진행되면서 할머님은 목소리는 우렁차게 변해갔고, 마침내 할머님은 젊은이 못지 않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동안 해 온 일을 돌이켜보니, 별로 세상에 도움주지 못한 일만 한 것 같습니다. 좀 더 살 수 있다면 더 많은 일을 하고 죽을텐데...저 한 20년만 더 살아도 되겠습니까?" 추대식이 열린 서울시 지방공무원 교육원 대강당을 '진동'하게끔 한 이 시원스런 목소리에, 이 날 참석한 많은 이들은 모두 할머님의 지난 공로와 거침없는 포부를 향해 갈채를 보냈다. 이 할머님이 바로, 현재 경산대학교 재단이사장으로 맹활약 중인 이육주 선생이었다.
막노동으로 교육 사업을...뜻깊은 이육주 선생의 '교육혼'
이육주 선생의 경력은 특이하다 못해 깜짝 놀랄 만하다. 어렵던 시절, 누구라도 고생하지 않은 사람 하나 없었건 만은, 이선생 역시 여자 몸으로는 차마 견디기 힘든 막노동과 공사장 밥장사를 도맡아하며 생활을 꾸려나갔었다. 그러던 어느날, 이선생은 못내 이뤘던 '교육'에 대한 열정을 후학에 대한 지원으로 옮기는 적극적인 생각을 몸소 실천하여, 마침내 스물아홉이 되던 1950년, 그렇게 어렵게 모은 돈 600만원 전액을 경기도 부평학교 교실 증축공사에 기증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힘들던 때였다. 나 하나 먹고 살기도 바쁘다며, 서로를 밀치고, 밟고 올라서던 시절이었다. 그런 때에 나라에서도 미처 신경쓸 수 없었던 '교육 문제'를 붙잡고 꾸준히 교육사업을 펼쳐온 이선생은 그로부터 14년이 지난 1964년에는 경산군 자인면 자숙도서관 건립 기금을 기증하여 한국 최초의 면단위 도서관 설립이라는 업적을 달성했고, 마침내 1972년에 경산여자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당시만 해도 부진했던 여성들의 교육을 도맡아 성실한 사회의 일꾼이자 가정의 지킴이를 육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선생의 '교육혼'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5년의 대성학원 재단이사장 취임 및 상주여자중학교, 대성중학교 인수, 1977년의 상주여자상업고등학교 병설인가 및 대합종합고등학교 설립을 이루었고, 고희가 지난 뒤에는 복지사업 및 인도주의 사업에도 손을 뻗쳐, 1994년에 노인복지시설 설립과 중국 연변족 노인들에게 송아지 535마리, 돼지 315마리를 보내고, 다음해에는 중국 단동시 보산촌 조선족 집단촌에 2년생 사과나무 6천그루 기증 및 조선족 본국 초청 지원을, 연이어 사회복지법인 복지마을 진흥회에 노인 여가시설 부지구입비 10억 4000만원 기증과 대구 뇌성마비 복지관 건립을 위한 토지를 기증하는 등, 이선생의 업적은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이선생의 이런 교육사랑, 노인사랑, 민족사랑의 정신은 온 나라에서 격찬을 받아, 국민훈장 동백장, 문교부 장관상은 물론, 대한적십사자 총재상 수상, 농수산부 장관 표창, 그리고 대통령, 법무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표창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여러 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고, 국민훈장 모란장과 자랑스런 여성상에 이어, 마침내 올해, 제 17대 '인간상록수'로 추대되기에 이른 것.
이쯤되면, 정말이지 이선생에게 비단 20년이 아니라 100년이라도 더 시간이 내렸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나올 수 밖에 없는데, 부디 이선생이 건강하게 오래오래 장수하며, 우리 나라와 민족을 위해 더 많은 일을 해주길 바라마지 않을 뿐이다.
취재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사진 임한희 기자 lhh@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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