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미 예고했던 대로 일본 정부가 2일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우리나라만 배제하는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제산업상과 아베 총리의 서명 뒤 공포 절차를 거쳐 21일 뒤 이번 조치가 본격 발효될 예정인데, 이달 28일부터 우리 기업들은 기존 반도체 소재 3개 품목 뿐 아니라 일본의 전략 물자에 포함되는 1100여개 품목(1194개)에 대해서도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만 수입할 수 있게 돼버렸다.
더구나 백색국가에서 제외됨으로써 비전략물자마저 캐치올 제도에 의거해 일본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만큼 그간 대일의존도가 상당했던 우리 수출기업들에게는 말 그대로 악재가 될 것으로 관측되는데, 그 여파를 보여주듯 이날 오전 코스피는 개장과 동시에 1% 넘게 떨어지며 7개월 만에 2000선이 무너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현 정권은 대통령부터 이전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시는 일본에게 지지 않을 것입니다”와 같은 낙관론에 빠진 두루뭉술한 발언이나 내놓고 있고, 그나마 내놓은 맞대응 카드라고는 이미 밝힌 바 있는 WTO 제소와 일본을 우리나라의 화이트리스트 목록에서 제외하겠다는 게 전부여서 일본에 실질적 타격을 입힐 실효적 조치라 평하기도 민망할 지경이다.
현재 일본이 별개 사안을 경제 보복으로 대응한다는 지적을 의식해 내색은 않고 있지만 모두 알다시피 이번 사태의 주요 원인은 지난해 10월 대법원이 한국 내 일본 전범기업들에게 내렸던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이에 따른 후속조치로 이들 기업에 대한 국내 자산 압류 움직임 등이 우선 꼽히고 있다.
우리 법원에선 양국 정부 간 맺은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개인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란 취지로 내린 판결이겠으나 일본으로선 중국과 그랬듯 정부 간 청구권 협정을 하지 않았던 경우(중국은 스스로 배상 청구 포기)에나 민사 차원으로 개인에 배상했을 뿐 한국에 대해선 정부 간 협정으로 끝났다는 시각인데다 이전 박근혜 정부와의 위안부 합의 결과로 만든 화해치유재단도 해산해버린 현 정권에 대한 불신까지 저변에 깔려 있어 한국이 의도적으로 다시 과거사를 내세워 자국을 압박한다는 반감만 갖고 있는 상황이다.
이 뿐 아니라 초계기 갈등을 비롯해 앞서 수차례 일본과 마찰을 빚어온 현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를 놓고도 일본이 제안한 제3국 중재위원회 설치 제안마저 끝내 거부해 스스로 대일관계에 있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는데, 일본이 지난달 수출규제조치를 취하고 나서야 사후약방문 격으로 2차례나 고위 특사를 보내 대화하자고 호소했지만 사실상 인내심이 다한 일본 정부는 적어도 문 정권과의 대화는 없다는 모양새다.
안 그래도 어려운 우리 경제에 큰 파장을 미칠 이런 조치들이 필연적으로 일어날 거라 보고 대비라도 해놔서 그토록 일본에 강경하게 나갔던가 생각했지만 7월 초 반도체 소재 3종 등 수출규제조치에 이어 한 달 뒤인 이번 8월 2일 화이트리스트 배제 조치에 이르기까지 거의 압박할 수단도 없이 일본에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다보니 여당 싱크탱크 보고서에서 나온대로 그저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일부러 국난을 자초한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만 깊어진다.
일본이 자국에서 열린 오사카 G20에서 자유무역을 외쳐놓고 정작 이에 반하는 조치를 취하는 데 대한 부담을 안고서라도 추가 보복을 강행한 걸 보면 현 정권을 길들이기 위해 작정하고 감행했다는 인상이 짙기에 처음에 참의원 선거용 운운했던 현 정권의 안일한 상황인식과 달리 앞으로도 사태는 장기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여기에 우리 정부는 당장 미국에나 호소하고 있지만 미국까지 이미 우리보다 일본 쪽에 힘을 실어준 듯한데, 실제로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지난 1일 미 고위 관리가 “한국이 정치적 효과를 노려 의도적으로 반일감정을 조장하는 것으로 보여 걱정된다”고 밝힌 바 있고, 지난달 31일 “우리는 (한일) 두 나라가 사태의 해법을 찾도록 촉구하고 지원할 것”이라며 중재 의사를 내비쳤던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역시 1일 태국에서 고노 일본 외상을 만난 뒤 “두 나라 스스로 앞으로 나아길 길과 긴장 완화 방안을 찾기 바란다”고 손 떼겠다는 모습을 보인 바 있다.
이런 판국에 정치권 일각에선 무작정 감정적으로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인 GISOMIA 파기까지 일종의 ‘카드’처럼 거론하고 있는데, 미국이 원해서 추진한 이 협정을 우리가 먼저 파기한다면 그나마 뒤로 물러나 관망하던 미국마저 완전히 돌아서게 만든다는 걸 왜 생각해보지 못하는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기 그지없다.
비단 이 뿐인가. 그간 일본과 각을 세우면서까지 관계개선에 공을 들였던 북한조차 이 와중에 연일 미사일을 발사하며 문 정부를 몰아세우고 있고, 중국과 러시아 군용기가 한일 갈등 상황을 노려 KADIZ를 침범하는 등 한국외교의 존재감이 그야말로 전무한 실정인데, 정작 필자초자 대한민국 국민이면서도 고립무원 처지인 현 정권의 외교 실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일본의 경제보복을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이나 기대가 전혀 들지 않아 뭐라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타까울 뿐이다.
최근 외신에선 미중 무역전쟁 와중에 한일 무역갈등까지 벌어져 이를 서로 비교하고 있는데, 도광양회를 저버리고 너무 이른 시점에 미국에 발톱을 드러내며 덤벼든 중국의 시진핑이 미국의 화웨이 제재 등으로 현재 경제난을 겪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도 냉정한 자세로 ‘극일’에 힘쓰기보다 당장 반일감정에 치우쳐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게 아닌지, 비록 늦었지만 문 정부에서 특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