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들의 밥그릇 챙기기에 정부가 결국 백기를 들었다. 지난 11일 보건복지부가 의사편에 선 수정된 의료법개정안을 규제개혁위원회로 넘긴 것.
보건복지부는 이날 당초 의료법 개정안에서 유사의료행위, 임상진료지침, 의료행위 개념, 의료비 할인ㆍ면제 조항 등을 삭제한 조정안을 마련해 규개위 심사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복지부는 “국민이 의료를 이용할 때 편의성을 증진시키고 안전성을 강화하는 것과 의료서비스 경쟁력을 강화시키는 기본원칙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불필요한 갈등과 소모적 논쟁을 유발하는 조항을 합리적으로 조정했다”고 수정안의 의의를 밝혔다.
그러나 각 시민단체와 의료계, 시민들의 반발이 만만찮다. 복지부는 법 개정의 기본원칙을 유지하면서 불필요한 갈등을 최소화도록 수정안을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 의료계의 등쌀에 못 이겨 균형을 잃은 수정안을 내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료계의 반발을 잠재운 것도 아니다. 수정안이 나오자마자 의료계는 “알맹이 없는 의료법 개정안 수정안을 거부한다”고 밝히며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이번에 복지부가 의료계와 시민단체 등의 의견을 수렴해 수정한 의료법개정안은 크게 네 조항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한의사 등이 강하게 반발해온 ‘유사의료행위 인정 조항’을 삭제한 것이다. 복지부는 의료행위가 아닌 유사의료행위(예 :수지침)의 근거규정을 두는 것이 법률체계상 맞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이 규정을 없앴다. 복지부관계자는 “의료법에 의료가 아닌 유사의료행위의 근거규정을 두는 것이 법률체계상 적합지 않다”며 삭제이유를 설명했다. 두 번째는 ‘붕어빵 진료’를 조장할 우려가 있다며 반대에 부딪친 ‘임상진료지침 신설’ 부분을 뺀 것이다.
세 번째로 건강보험 비급여 항목에 대해 의료비 할인·면제를 허용키로 한 것을 철회했다. 이는 과도한 가격경쟁으로 의료 질 저하가 나타날 수 있다는 의료계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의료행위에 규정했던 ‘투약’ 개념을 없앴다. 당초에는 투약개념을 의료행위에 포함시킴으로써 무면허의료행위에 대한 판단을 명확히 하려 했지만 의사들의 반발에 아예 삭제한 것이다.
시민단체, ‘의료계 달래기식 수정안 접어라’
이처럼 의료계의 편에 바짝 다가서 후퇴한 개정안에 각 단체들도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경실련은 의료법개정안은 각계의 의견을 수렴했다고 하지만 정작 반영된 내용은 그나마 국민건강에 도움이 될 만한 내용마저 삭제하며 의사들의 힘에 굴복해 의료계요구에 충실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난했다. 경실련은 “이번 수정안은 의료계 설득용으로 이로 인한 부담과 불편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돌렸다”며 “국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해 본래의 목적인 국민건강보호와 증진에 기여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합의안을 만들 수 있도록 적절한 조정역할을 해줄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보건의료단체들의 비난도 잇따르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산업화 조항을 고수하고 의사들의 요구를 전면 수용한 반면, 노조와 시민사회단체 요구는 전면 거부됐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이처럼 의사 편에 선 수정안에 많은 단체와 국민들이 어리둥절해 하고 있지만 의료계는 반발의 수위를 더욱 높이고 있다.
의사협회 장동익 회장은 정부의 개정안 발표 즉시 입장 표명을 통해 “복지부가 규개위에 넘긴 의료법 개정안은 의료계의 의견을 절반만 수용한 것”이라며 “나머지 조항에 대한 문제로 수용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 의료계 3개단체장은 이번 의료법 개정안이 국회 보건복지위 법안소위에 상정될 경우 무기한 단식투쟁에 돌입할 것이라고 투쟁의지를 천명했다. 뿐만 아니라 한의과대학생들을 필두로 의과대, 치과대 학생들이 무기한 수업거부를 하는 한편, 전공의들은 환자당 15분씩 진료하기 운동이라는 준법투쟁에 돌입한다고 의협측은 밝혔다.
벌써 적극적인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의협, 치협, 한의협, 간호조무사협회로 구성된 범의료 의료법비상대책위원회는 이번 수정안을 거부하는 뜻으로 지난 12일부터 세종로 정부 중앙청사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이들은 오는 5월까지 의료법안 개정일정에 따라 매일 1인 시위를 벌일 것이라 선언했다.
국민들의 반발을 각오하면서 의사들을 달래기 위해 의료법을 대폭 뜯어 고쳤음에도 전면수정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의료계.
자신이 가진 권리는 빼앗기지 않으려 하고 책임도 지지 않으면서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한 전형적인 집단 이기주의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국민의 건강권이란 대의명분을 방패삼아 밥그릇 챙기기에 전념하는 행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열에 아홉을 내 줬는데도 열을 다 내주지 않았다고 떼를 쓰는 형국이 아닐 수 없다.
그러는 사이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 됐다. 한 예로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비급여 진료비의 할인·면제를 허용하기로 한 개정 조항을 삭제함으로써 환자가 좀 더 싼값에 진료 받을 수 있는 길을 막은 것을 들 수 있다. 의사들의 막나가기 식의 요구에 34년만의 의료법전면개정은 개악의 길로 가고 있다. 의료의 공공성을 훼손해가면서 의료를 산업화시키고 국민의 건강을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키게 생겼으니 말이다.
국민건강 최우선으로 삼아야
의료계는 의료법개정안이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민의 건강을 볼모로 삼은 채 올해만 두 번 집단파업을 했다.
두 번의 투쟁, 아니 투정이 먹혀들었으니 쐐기를 박으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에서 수정안에 다시 한번 딴죽을 거는 지도 모르겠다.
의료계는 지금이라도 국민의 건강을 무기삼아 밥그릇 챙기기에만 혈안이 되지 말고 의료의 공공성과 국민건강권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