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12일 현행 ‘전략물자 수출입고시’ 개정해 백색국가에서 일본을 제외키로 했다고 전격 발표했다.
앞서 지난 8일 일본이 수출 규제를 강화한 반도체 소재 3종 중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수출허가를 내주는 등 일부 완화된 자세를 취했던 데다 문재인 대통령도 같은 날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일본이 수출규제를 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러다 보면 실제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고 밝혀 그간 악화일로로 치닫던 국면이 이제 수습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있었지만 결국 맞불을 놓는 ‘강 대 강 대치’가 이어져 가고 있다.
좋든 싫든 안보 측면에 있어서도 공조가 불가피한 양국이 지금 경제로 맞대결을 벌여봐야 어느 쪽이 더 피해를 입느냐가 무의미한 ‘상처뿐인 승리’만 남을 텐데 우리라도 일본보다 성숙한 자세를 가지고 갈등을 매듭짓기 위해 적극 나서기보다 똑같이 대응하며 이렇게 사태를 장기화해봐야 그 종극에 과연 대통령 본인 지지율 상승 외엔 무엇이 남겠나.
물론 일본이 수출 규제 조치를 취하면서 지난달 4일 하기우다 고이치 자민당 간사장 대행이 “(한국에 수출된 화학물질) 행선지가 어딘지 알 수 없는 사안이 발견돼 조치를 취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 데 이어 7일 아베 총리도 “한국은 (대북) 제재를 잘 지키고 있고, 무역관리를 확실히 한다고 주장하나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무역관리 규정도 어길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역설하면서 안보 차원에서 단행한 듯 발언하다가 16일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이 “한 번도 그런 걸 말씀드린 적 없다”고 일축하는 등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고 설명이 오락가락하는 부분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다만 아베 총리가 수출 규제 조치 후 첫 반응으로 내놨던 ‘국가 간 약속을 지키지 않는 상황’과 이달 초 일본이 강행한 화이트리스트 배제 발표 후 6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이 한일청구권협정을 일방적으로 위반했고, 국교 정상화의 기반이 된 국제조약을 어기고 있다”고 거듭 강조한 데 비추어 이번 경제보복의 주요 원인은 불화수소 반출 의혹 등 안보 차원이라기보다 지난해 10월 있었던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에 따른 과거사 갈등이 원인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치적 사안일 과거사 문제로 수출 규제 조치나 백색국가 배제 조치를 단행했다고 한다면 WTO 위반 등 자칫 일본에 불리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대놓고 강제징용 배상 판결 문제 탓이라 지적하지는 못한 채 계속 에둘러 표현하는 것으로 비쳐지는데, 당초 국내 일본 기업의 자산 압류를 비롯해 충분히 외교문제로 비화될 수 있는 사안이 담긴 판결임에도 지난해 10월 이후 정부가 내내 삼권분립만 내세우며 사실상 모르쇠로 대응해온 데 대해선 ‘외교 방치’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일단 자성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문 대통령은 노무현대통령 시절인 지난 2005년 강제징용 피해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뤄진 한일협정 문서 공개를 계기로 발족됐던 당시 민관 공동위원회에 정부 위원으로 참가했으며 이때 한일협정으로 일본에게서 받은 무상 3억 달러에 강제징용 보상금이 포함됐다고 본다는 결론이 나와 6184억 원을 노 정부에서 지급했음에도 왜 이제 와서 이를 뒤집는 판결엔 경제전쟁까지 불사하면서 당연하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일본은 수출 규제 조치를 단행하기 이전에 수차례 문 대통령에게 한일협정상 절차에 따라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관련해 양국이 논의하기 위한 중재위원회 구성 등을 요구해왔지만 정부는 여기에 묵묵부답으로 불응해왔는데, 사태를 방치하는 듯한 이런 소극적 태도가 문 대통령 측근인 양정철 씨가 원장으로 있는 민주연구원 보고서 내용처럼 내년 총선을 목적으로 한일갈등과 반일여론을 이용하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키우는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박수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일본의 경제보복이 졸렬하다 해서 우리도 똑같이 백색국가 제외 같은 식으로 대응하면 아무리 우리 정부 스스로 국제법 내에서 적법하게 진행돼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상응조치가 아니라고 강변해도 과연 제3국이 보기에 ‘경제 보복 아니라고 주장하는’ 일본 태도와 차이가 있다고 보이겠는가.
소위 외교란 국내 여론만 바라보고 하는 게 아니라 국익을 우선하면서도 상대국과 적극 대면하면서 협상하는 것인데, 외교적 해법을 최우선으로 고려한다는 문 대통령이 진정 ‘정치’가 아니라 ‘외교’를 하려는 게 맞는지 이 자리를 빌려 되묻고 싶다.
진심으로 이번 사안을 풀어나가고자 한다면 문 대통령이 이날도 “우리 대응은 감정적이어선 안 된다”면서 같은 날 일본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다는 산업부장관 발표를 동시에 내놓는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면서 일본이 우리의 대화 요구에 답하지 않는다고 탓하기나 할 게 아니라 일본의 경제 보복 조치를 초래한 원인인 지난해 10월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 일본이 요구해온 부분들을 우선 진지하게 귀 기울이고 마주하는 자세부터 취하는 것만이 이번 사태를 대화로 풀어나갈 첩경임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