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와 기억"展
'박영덕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존재와 기억>展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네 화가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 화백과 극사실적 묘사의 달인 김창영 화백, 스크래치 기법을 이용한 연작을 통해 익숙한 안병석 화백, 의자를 이용한 작품으로 눈길을 끌고 있는 지석철 등 4인이 바로 이들인데, 이들을 한데 모으는 주제는 바로 '존재와 기억', 얼핏 직접적으로 와닿지 않는, 참 추상적인 주제이다.
먼저 김창열의 작품을 살펴보자. 그가 이 전시에 소개한 작품은 '회귀' 연작. 물론 물방울 연작의 한 갈래이지만, 깔끔하고 깨끗하게 묘사되었던 이전에 비해, 이 연작은 '그답지 않은' 거친 붓놀림을 선보이고 있으며, 마치 '순간'을 급하게 남겨 존재성을 '급조'하려는 듯 보이기까지 한다. 빠르게 현상을 포착해야 한다는, 그리고 그 찰나의 현상이 존재의 증거가 되고, 곧 '기억'의 일부가 된다는 주장이 서려있는 듯한 '회귀' 연작은 어딘지 '김창열치고는 미흡한 완성도'라는 느낌이 들면서도, 절대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김창영은 '샌드 플레이(Sand Play)' 연작을 통해 보다 '분명하게' 주제에 접근해낸다. 부산 해운대 모래사장의 발자국을 모래의 허상 일루젼을 통해 묘사한 그의 연작은 시간과 자연현상에 의해 지배받는 존재성에 대한 의문과, 이것이 '기억'으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리고 소멸된 존재는 어떤 의미로 바라봐야 하며, 이의 재생성은 또 어떤 의미인지를 추적하고 있다.
안병석의 경우, 몇 번이고 연속해서 바탕을 칠하고 닦아내는 과정을 연속하여, 가장 자연스러운 스크래치의 영역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번에 전시되고 있는 '바람결' 연작은 이 '자연스런' 스크래치가 그대로 '자연현상'인 '바람'으로 묘사되어, 존재를 분명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성'을 일궈내기 어려운 '바람'의 성질을 가볍고 산뜻하게 표현해내고 있다. '바람'의 '기억'을 지니고 있다해서, '바람'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상상력이 깃든 예술적 창작물을 통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지막으로, 의자를 통해 자기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지석철의 작품들은, 이 전시에 소개된 여러 작품들 중에서 가장 난해하며 복잡한 알레고리를 지니고 있다. '변신의 무언극', '시간, 기억 그리고 존재' 등의 극사실적 작품들은 아슬아슬한 균형감을 이루고 잇는 '의자'를 통해 '나'라는 존재가 얼마나 위태로운 '현상'인지에 대해 '토로'하고 있으며, '나'라는 이 위태로운 과정의 연속체에 '시간'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기억'의 본질이 아닌가하는 추론을 보여주고 있다.
난해한 전시이다. 복잡한 상징체계를 지니고 있으며, 이것이 서로 맞물리지 않고 각자 나름의 '아나키스틱'(?)한 설정방향으로 흩뿌려져 있어, 보는 이들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모두가 공감할 만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기억과 존재에 대한 복잡다단한 사고체계를 담아낸 이 전시 역시, 언젠가는 '기억'이라는 테두리 안에 갇혀 버릴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결국 이 '기억'으로써 존재를 증명할 수 박에 없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 전시는, 이러한 사고의 안과 밖에 존재하며 우리의 이성체계를 뒤흔들어내고 있는 '이벤트'이다.
(장소: 박영덕화랑, 일시: ∼200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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