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3일 아침 서울 중부경찰서에서는 백발의 80대 할머니를 둘러싸고 중년 남녀의 싸움이 벌어졌다. 삿대질과 욕설이 난무하는 싸움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친남매와 그의 배우자들. 힘없이 웅크린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할머니는 이들의 어머니다.
82세의 H모 할머니는 전날 오후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서 작은 보따리 두개와 함께 발견 됐고 길 잃은 노인으로 착각한 경비원에 의해 경찰서로 오게 됐다. 할머니에게서 아들과 딸의 연락처를 알아 낸 경찰은 자식들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전화는 꺼져 있었고 결국 할머니는 인근 경찰 지구대에서 한뎃잠을 잤다.
아침 댓바람부터 시작된 실랑이는 몇 시간이 지나도록 끊일 줄 몰랐다. 피를 나눈 이 가족이 경찰서에까지 출두해 험한 꼴을 보인 것은 서로 어머니를 모시지 않겠다는 이유에서다.
지난 12일 가족들이 모여 저녁을 먹을 시간, 서울 방산시장에 어느 경비실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백발의 할머니가 발견됐다. 할머니는 옷가지와 생필품이 담겨 있는 쇼핑백 2개를 옆에 둔 채 쌀쌀한 저녁바람을 맞고 있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비원이 할머니에게 다가가 길을 잃었냐고 물었지만 할머니는 묵묵부답. 하는 수없이 경비원은 112에 신고를 했고 곧 경찰이 출동해 할머니를 경찰서로 데리고 갔다.
이집저집 끌려 다닌 노모
경찰서에 도착한 후에도 할머니는 머뭇거리기만 할 뿐 집이 어디며 자식들의 연락처는 무엇이냐는 경찰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결국 할머니는 아들 둘에 딸 둘이 있다며 어렵사리 입을 뗐다. 그리고 이어지는 레퍼토리. 이 할머니는 “자식들이 버린 게 아니라 내발로 나온 것”이라는 말로 애써 자식들을 옹호했다. 경찰의 채근에 할머니는 자식들의 집 전화와 휴대폰번호를 알려줬지만 몇 시간 째 휴대폰은 꺼져 있었고 집전화도 받지 않았다. 결국 이날 밤 할머니는 한 평 남짓한 경찰서 유치장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야 했다.
이튿날 아침, 50세의 한 중년여성이 화를 삭이지 못한 채 경찰서에 들이닥쳤다. 가까스로 연락이 닿은 큰딸이다. 큰딸은 다짜고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자신은 어머니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 이어 딸은 노모를 향해 “왜 오빠를 부르지 않고 날 불렀냐”며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딸의 행각을 보다 못한 경찰은 작은 아들(53)에게 연락해 경찰서에 와 줄 것을 당부했으나 아들은 “여동생이 갔으니 된 것 아니냐”며 한사코 거부했다. 아들과 딸이 한자리에 모여야 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릴거라 여긴 경찰은 결국 아들의 집까지 찾아가 아들을 경찰서로 데려왔고 마침내 아들부부와 딸 부부, 그리고 어머니가 대면했다.
그때부터 이 가족의 사연은 하나둘 밝혀지기 시작했다. 21년 전 남편을 여인 할머니는 장남내외와 함께 살았다. 그러다 남편과 사별한지 3년 만에 병으로 큰아들마저 떠나보내고 할머니는 남은 자식들의 집을 전전해왔다. 5개월 전부터는 방산시장에서 재단사를 하며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첫째 딸의 집에서 지냈는데 이때부터 둘째 오빠와 트러블이 생기기 시작했다. 둘째 아들역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재단사를 하고 있는데 이들은 매일같이 서로에게 어머니를 떠맡기며 데려가라고 다퉜다. 그러다 지난 12일 화가 끝까지 치민 큰딸은 오후 4시경 옷가지 몇 벌을 챙긴 채 어머니를 데리고 오빠의 가게로 데려다 놓고 돌아와 버렸다.
평소 시어머니 모시기를 끔찍히 싫어한 데다 시누이의 막가는 행동에 화가 난 작은 아들의 부인은 10분 새 다시 큰딸의 집에 어머니를 되돌리기에 이르렀다.
이에 격분한 큰딸은 다시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작은 아들의 가게에 가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따져댔고 남매의 싸움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남매의 실랑이를 보다 못한 노모는 가슴을 치며 밖으로 나와 시장을 떠돌았다. 그사이 아들과 딸은 어머니의 행방은 아랑곳하지 않고 문 닫을 시간이 됐다며 가게 문을 굳게 잠궈 버렸다. 싸움이 멎었으리라 생각하고 아들의 가게 앞으로 온 할머니는 닫혀버린 문 앞에서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누군가의 집으로 가기엔 머쓱해진 할머니는 갈 길을 잃고 경비실 앞에 쪼그리고 있었고 이를 본 경비원이 신고한 것이다.
경찰조사결과 남매는 서울시내에 번듯한 아파트를 보유하고 먹고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의 수입원을 가졌다. 실제로 경찰서에 출두한 날도 번쩍이는 보석반지에 번듯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뒤늦게 이 남매는 “누군가가 모셔갔을 거라 생각하고 집에 간 것일 뿐 어머니를 버린 것은 아니다”라고 구차한 변명을 했다.
존속유기혐의로 불구속
이처럼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는 ‘현대판 고려장’은 비단 이 가족의 일만은 아니다. 작년 한해만 자식으로부터 학대를 받았다고 신고접수한 건수가 3천9백88건에 달했다. 자식에게 누가 될까 쉬쉬하는 부모를 고려하면 그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따르면 노부모를 학대하는 가해자로 아들이 56.3%, 며느리가 12.6%를 차지했다. 남의 집 일이라고 못본 척 한 것이 이같은 끔찍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학대를 가족 문제로 간주하고 이를 숨기려 드는 것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입을 모은다.
조사가 끝날 때 까지 언성을 높이고 욕설을 퍼붓던 남매 옆에서 어머니는 “오래 산 것이 죄지 애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느냐”며 탄식을 할 뿐 끝까지 자식들 탓은 하지 않았다.
팔순의 노모를 길거리에 내 몬 비정한 작은아들과 큰딸 부부 4명은 결국 존속유기혐의로 불구속 입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