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랍일자, 정부의 대응, 가나무역의 실체 등 의혹투성이
이라크에서 피랍된 김선일씨가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절규하는 장면이 알 자지라 방송에 나온 지 41시간 20분 만에 목이 잘린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그러나 그의 억울한 죽음과 관련하여 풀리지 않는 미스테리들이 많다.
정부, 정말 납치 사실 몰랐나?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은 6월 1, 7, 10, 11일 현지 대사관을 방문했다. 무척 바쁜 나날을 보냈을 김 사장이 어떤 이유로 김씨 피랍 이후 네 차례나 대사관을 방문했으며 과연 김씨와 관련해 아무런 이야기도 안 했을까.
또 실종 사실을 안 뒤 교통사고를 당한 것으로 여겨 주변 경찰서 등을 열흘간 탐문했다는 데 어떻게 대사관은 이를 까맣게 몰랐을까. 사건이 알려진 직후 외교부는 전화 통화와 e-메일을 통해 교민들의 안전을 점검하고 있다고 밝혔다. 교민에게 e-메일을 보냈다며 원문을 공개하고 기업체의 경우 대표에게만 보냈다고 밝혔다.
가나무역의 현지 직원 10여명이 모두 김씨의 실종 직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또 6월 중순엔 교민들도 상당수 김씨의 실종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바그다드 대사관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납득하기 쉽지 않다. 임 대사는 24일 바그다드 주재 대사관은 김씨 피랍 사실이 공식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김씨를 포함, 동양인의 피랍설에 대해 어떤 첩보도 받은 바 없다고 거듭 주장했다.
김씨 테이프를 받은 AP는 이 비디오를 당장 방영하지 않았다. AP는 사실 확인을 위해 6월 3일 외교통상부에 문의했다고 밝혔다. 23일 AP 보도에 따르면 서울 주재 AP 기자는 외교통상부의 한 관리에게 김씨의 실종 혹은 피랍 여부를 확인했다고 한다. 당시까지 김씨의 피랍 사실을 모르고 있던 외교부 관리는 "현재 납치되거나 실종된 한국인은 없다"고 대답했다는 것이 AP측의 주장이다.
외교통상부는 AP의 보도 후, AP로부터 전화를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하다가, 25일 AP와 통화한 사무관 2명을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여 상부에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들 사무관이 AP 문의에 적극적으로 응했다면 김씨의 피랍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기회를 놓친 것이다. AP 보도가 사실로 드러남 에 따라 외교부의 미숙한 대응은 물론 참여정부의 도덕성에도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됐다
미국과 AP도 수상하다
외교부와 AP통신간 '진실게임'은 풀렸지만 여전히 많은 의문점이 남아 있다. AP는 6월 3일 테이프를 입수했다고 한다. 이라크 무장세력에 의한 외국인, 특히 파병국 국민에 대한 참수가 국제적인 뉴스로 보도되던 시점이다. 뉴스 가치가 큰 비디오테이프에 대해 3일 문의 후 재차 확인을 시도하지 않았다는 점은 언론의 특성상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다.
또 AP는 한국인이 피랍돼 생명과 관련된 사실을 인지했으면서도 실무자에게 단순한 확인전화 정도만 하고, 외교부의 책임있는 당국자에게 공식적으로 확인을 요청하지 않았다. 게다가 피랍의 결정적 자료인 비디오테이프를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한편 AP는 왜 바그다드가 아닌 서울로 김씨의 실종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던 걸까. 임홍재 바그다드 대사에 따르면 AP는 바그다드 주재 한국대사관에 실종 사실을 문의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임 대사는 24일 "APTN으로부터 김씨의 피랍과 관련해 일절 문의 받은 바 없다"고 밝혔다. AP측도 바그다드 주재 한국대사관에 알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이라크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고작 60여명이다. 만일 AP가 외교 통상부가 아닌 한국대사관에 직접 이 사실을 문의했다면 사태 파악과 구명에 보름 정도의 시간을 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정말 몰랐을까.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은 원청업체인 미군서비스업체 AAFES 사에 김씨 억류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두 차례 타진했다고 밝혔다. AAFES사 경영진 등에 현역 장성과 장교가 대거 포진한 만큼 미군측은 자연스럽게 김씨 피랍을 인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미군측은 CNN 보도를 통해 처음 알았다고 밝혔다. 이부분도 미스테리다.
납치주체에 대한 의혹
김선일 씨를 납치한 조직과 김씨를 살해한 조직이 다를 수 있다는 의혹이 강력히 제기되고 있다. AP통신이 뒤늦게 공개한 비디오테이프와 알자지라가 방영한 테이프를 비교하면 분위기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AP 테이프에서 김씨는 "진짜 테러리스트는 부시 대통령"이라고 말하는 등 미국을 비난하고 있지만 비교적 침착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상대를 설득해볼 수도 있겠다고 여기는 김씨의 분위기와 노력이 두드러졌다. 김씨는 아랍어를 쓰면 호감을 살 것으로 기대하면서 애써 아랍어를 구사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비교적 침착했고 사지에 처한 절박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반면 지난 21일과 23일 알자지라에서 공개한 동영상에서 보여진 김씨는 "나는 살고 싶다"고 울먹이는 등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있었다.
또 알자지라의 동영상에는 무장단체의 조직(일신과 성전)을 상징하는 검은 깃발이 등장했다. AP의 비디오테이프에는 그런 깃발이 등장하지 않았다. 반면 AP 테이프에는 소총을 든 범인도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결국 김씨를 납치한 조직과 김씨를 살해한 조직이 다를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된다.
납치범은 무엇을 원했는가? - 파병철회 VS 돈
이라크 전쟁 이후 치안이 극도로 불안해지면서 이라크에는 납치사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바그다드 등 이라크 대도시에서는 이라크인들 간 납치까지도 성행하고 있다.
지난 4월 만수르 지역에 사는 셰이크 자말씨는 한 괴한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12살 된 그의 손녀 바스마를 보호하고 있다는 사람의 전화였다. 이들은 셰이크 자말에게 10만디나르를 요구했다. 그는 경찰에게 연락했지만 자폭테러로 바쁜 경찰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했다. 결국 자말은 3일 후 납치범들이 요구한 돈을 건네주고 바스마를 찾아왔다. "손녀를 찾은 것에 만족한다. 그러나 이라크 경찰과 더불어 치안 불안을 야기한 미군의 이라크 전쟁을 증오한다"고 말했다.
전쟁 직후 납치가 극성을 부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치안 불안을 틈타 납치를 전문으로 하는 범죄조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차 한대와 몇 명이면 가능하다. 이 같은 납치조직들이 최근 저항단체나 국제테러집단을 위해 일한다는 소문도 있다.
지역 내 민간 경호원이나 자체 방위군 등으로 가장한 이들이 검문을 빌미로 외국인과 자국인을 납치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김씨를 최초로 납치한 무장단체 역시 김천호 사장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보상금이 마음에 들지 않자 ‘알-타우히드 왈-지하드’에 김씨를 넘겼을지 모른다는 것이 현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가나무역의 김천호사장은 정부의 비밀정보원?
한나라당 박 진 의원(서울 종로)은 24일 대정부 긴급현안질의에서 “김천호씨는 정부 측과 긴밀한 협력관계에 있으며 중요한 취재원 가능성이 높다”며 “주 이라크 한국대사관과 김 사장이 김선일씨 납치사건 수습문제를 비밀리에 협의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박 의원은 이라크 바그다드에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 바그다드 무역관에서 작성한 ‘이라크 현지 동향 주간보고(4월 30일~5월 8일)’를 그 근거로 제시했다. 보고서 내용 중 ‘미군측은 PX 물자를 공급하는 가나무역 김천호 사장에게 5월 8일부터 인근 국가로부터 물자를 들여오는 것을 줄이는 게 좋겠다고 제안했으며, 이에 대해 김 사장은 5월 8일부터 미국이 새로운 군사 작전을 벌이거나 저항세력의 공세가 예상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런 보고내용을 참조해볼 때 KOTRA에서는 이라크 무역 및 현지의 정치·군사적 동향 파악과 관련해 김 사장을 매우 중요한 인물로 취급하고 있으며, 정보를 취합·가공할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한편 박 의원은 또한 “김 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가나무역은 1991년 걸프전 때부터 미군 부대에 군납을 해왔다”고 주장했다. 미군 측과 직간접적인 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내일신문은 25일 김천호 사장이 납품했던 원청회사인 AAFES의 이사 중 상당수가 현역 미 장성으로 AAFES는 일반기업이 아닌 미국의 군·정부·민간이 합동으로 설립해 운영하는 미군조달기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만약 이 내용이 사실이라면 김 사장이 김선일씨 피랍 문제와 관련, 미군 측과 직간접적인 소통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대목이다.
다만, 일부에서는 김 사장의 잦은 진술 번복과 귀국 거부 등의 행각과 관련, 국정원의 비밀정보원이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고 있으나 KOTRA 동향보고에서 주요 정보원인 김천호 사장을 ‘실명’으로 적시하고 있어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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