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주화 운동가에서 재야 학자, 그리고 정치인으로
한나라당 탈당과 함께 시베리아행…다시 봄날 오나
대선 레이스 본격 돌입…운동화 끈 조이는 손학규
막판 발 빼기 ‘정운찬’ 효과로 범여권 내 유력후보
지난달 30일 오후, 범여권의 잠재적 대선주자 두 사람이 전혀 다른 노선을 공고히 했다.
그 주인공은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와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 정 전 총장이 현실정치의 벽을 넘지 못하고 대선 불출마선언을 공식화 한데 반해 손 전 지사는 지지모임인 ‘선진평화포럼’의 창립기념식을 가진 것이다.
한나라당 탈당 후 40여 일간 눈밭을 걷던 손 전 지사는 ‘좌우를 넘어서는 새로운 중도정치’를 기치로 내걸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한데 모았다. 같은 날 같은 시각 이뤄진 이들의 선언은 정치계를, 특히 범여권을 흔들어 놓기 충분했다.
그리고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은 것은 손 전 지사다. 뚜렷한 스타 없이 안개 속을 헤매던 범여권에 히든카드였던 정 전 총장의 느닷없는 발 빼기는 범여권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 상황에서 손 전 지사의 적극적 움직임이 실낱같은 불빛이 된 것.
이에 따라 손 전지사로의 쏠림현상은 더욱 가속화 되면서 범여권 내 단독후보로 지목될 가능성마저 제기되고 있다. 성공한 도지사에서 범여권의 마지막 희망으로 급부상하고 있는 손학규의 발자취를 되짚어 본다.
손학규를 언급할 때 ‘도박’ 이란 단어를 붙이곤 한다. 이따금씩 터지는 일명 ‘손학규식 정치적 도박’은 늘 정치권을 긴장하게 만들곤 했다. 위험을 감수하면서 도박에 가까운 도전을 시도하는 손 전 지사. 그의 인생 역시 예측불허의 연속이었다.
그의 인생 1막은 민주화와 노동운동가로서의 삶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1학년 때인 1965년 한-일 회담 반대 단식농성을 시작으로 학생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이듬해 한국비료 사카린 밀수 규탄시위와 학원자유화투쟁에 가담해 이중 무기정학 처분을 당한 뒤 탄광과 공장을 전전하며 학생운동을 본격화했다. 이때 법대에 다니던 고 조영래 변호사와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과 더불어 서울대 운동권 삼총사로 불렸다.
그는 “한전 노조위원장이 돼 서울시내 불을 일시에 끄면 혁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국전력 입사시험을 볼 정도로 과격한 청년이었다.
수배자에서 교수, 정치인으로
이 같은 민주화 운동으로 숱한 고문과 투옥을 경험한 손 전 지사는 군 제대와 대학교 졸업 후 문리대학 선배였던 소설과 황석영과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이후 1975년 도시산업선교회의 박형규 목사와 함께 청계천 판자촌에서 빈민운동을 하면서 현상금 2백만원에 2계급 특진이 붙은 수배자로 2년간
저작권자 © 시사포커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