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진 마스크, 희미해진 '본성'
'수퍼히어로'물은 본래 '탄생'편이 가장 흥미로운 법이다. 어떻게 평범 - 내지는 평범 이하의 - 한 인물이 수퍼히어로로 변신하게 되는지, 그리고 수퍼히어로가 되면서 주인공의 주변 일상은 어떻게 변모하는지, 나아가 이 평범한 인물의 '마인드'가 어떤 식으로 재조정되는 지를 한꺼번에 보여주는 1편-'탄생'편에 비해, 그 뒤의 후속편들은 '이런 인물이 벌이는 후속 어드벤쳐'를 담아내는 식의 천편일률적인 액션 블록버스터가 될 수 밖에 없는 것. <수퍼맨> 프랜차이즈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소재성격을 바꿔 쾌속정같은 스피드의 코미디/풍자물로 선회하였고, <배트맨>의 경우는 보다 심화된 이상성격 탐구의 테마로, <엑스맨>은 소재의 특성상 '새로운 캐릭터'들의 첨가로 전편의 '마성'을 극복하려 애썼는데, <스파이더-맨>의 속편이 선택한 극복 방향은 <수퍼맨> 프랜차이즈와 정확히 대치되는 '멜로드라마적 노선'으로서의 소재성격 변환이었다.
이런 급격한 성격 변환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시킬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지난 날 소재의 성격 변환을 꾀했던 많은 속편들이 실패한 주요인인 '원인점의 미제공'을, <스파이더-맨>의 감독 샘 레이미와 아카데미 2회 수상의 전설적인 각본가 앨빈 사전트는 분명 파악하고 있었던 듯 보인다. 바로, <스파이더-맨 2>는 플롯상의 대전환점을 '벗겨진 마스크'에 집중시키고, 과연 '스파이더-맨'이 마스크를 벗고 '피터 파커'의 아이덴티티를 밝힐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끈질기게 추적한 것이다. 이를 통해 전체적인 이야기는 '마스크를 벗기 전의 딜레마'와 '마스크를 벗고 난 뒤의 해소'에 집중되어 자연스럽게 드라마성의 강조를 관객들에게 납득시키고 있으며, 테마의 변환과 페이스의 변환, 소재성격의 변환이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가운데 관객들은 달라진 무드에 쉽게 마비되어 '전편이 중복되고 있다'는 당연한 속편의 딜레마를 감지해내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이렇듯 '공들인' 전략에도 불구하고, <스파이더-맨 2>는 시시하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대폭 늘어난 드라마 파트는 명확한 존재이유와 잘 짜여진 구성력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진행을 중단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전편의 반복은 아닐지언정, 전편보다 흥미와 박력이 떨어진다는 인상을 지우지 못한다. 그리고 이런 역효과의 원인에는 이 속편이 내세운 캐치프레이즈인 '변환의 원인점', 즉 '마스크를 벗은 초인'의 테마가 자리잡고 있다.
'스파이더-맨'이 가면을 벗고 '초능력을 얻었을 뿐인 평범한 피터 파커'로 거듭나는 순간, 전편 최대의 매력이었던 '만화적 키치성'이 소멸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의도적인 듯 보이는 이런 방향성은 전편의 슬랩스틱적 동작을 반복하는 악역 '그린 고블린'에 비해 훨씬 육중한 동작과 그보다 더욱 육중한 운명을 지니고 있는 '닥터 옥토퍼스'의 설정에서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으며, '스파이더-맨'이 벌이는 모험 역시 마치 '이공간에서 벌어지는 환상적 모험' - 전편의, 차이나 드레스를 입은 '메리 제인'을 덥치는 '그린 고블린'의 습격 장면을 떠올려 보라 - 의 성격을 띠었던 전편에 비해, 뉴욕이라는 실제 도시에서 벌어지는 '현실적인 어드벤쳐'의 이미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다.
관객들은 '스파이더-맨'을 원하고 있다. 하늘을 나는 '스파이더-맨', 중력을 무시한 '스파이더-맨', 번개보다 빠른 '스파이더-맨'. 그리고 이를 가장 잘 표출시킬 수 있는 동화적 상상력과 키치적 접근방식, 저돌적이고 재기발랄한 연출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화적 상상력이 현실에 안착하고, 키치적 접근방식이 진지한 갈등구조 묘사로 탈바꿈하며, 재기발랄한 연출이 진중하고 무게감있는 정공법적 연출방식으로 변모한, '스파이더-맨의 복장을 한 피터 파커'의 이야기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주는가'라는 상업영화의 기본적인 수용자/제공자와 관계에서 동떨어진 방향성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수퍼히어로'물은 '수퍼히어로'물일 뿐이고, 다른 식으로 이를 이해하는 일은 잘해야 무의미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불쾌감을 일으키고 만다. <스파이더-맨 2>는 '수퍼히어로'물의 성격을 포기하고 'SF/액션 블록버스터'의 잘 닦여진 길을 선택한 속편이며, 이런 종류의 방향성이 지니고 있는 장점과 단점을 모두 껴안기를 각오한 영화이기도 하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속편의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런 역효과를 감수해야만 한다면, 차라리 천편일률적으로 굳어버린 '전편과 똑같은' 속편을 선택하겠다. 그런 속편은, 적어도 '수퍼히어로'물을 본다는 감흥 정도는 명확히 전해줄테니 말이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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