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만화원작'이라고만 알려지고 마는 히트 아이템 '수퍼히어로'물. 그러나 이를 출판사의 스타일로 다시 m `
영화에 있어서 '수퍼히어로'물이라는 것은, 사실 '만화원작'이라는 '분류 통칭'으로 이해할 만한 것은 아니다. 일례로, 한국이나 일본에서도 만화가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고, 또 만화원작의 영화화도 종종 이뤄지고 있지만, 실제로 '수퍼히어로' 만화가 존재하지도, '수퍼히어로' 영화가 특별히 존재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수퍼히어로'물이란 기본적으로 영웅주의가 국민정서에 배어있는, 그리고 유난히도 SF물을 즐기는 '미국'의 상징적인 상업적 아이템이자, 그 비틀린 제국주의와 심리적 갈등, 강렬한 '변태 의지'를 알려주는 '케이스 스터디'로서도 작용할 수 있는데, 여기서 출판사 별로 스타일과 방향성이 달라지는 미국 내에서의 '수퍼히어로'물 분류와 함께, 그 세계관과 상업적 전략의 차이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수퍼히어로'물이 지닌 무엇이 미국인들을 이토록 오랫동안, 끈질기게 사로잡고 있으며, 각각 어떤 방향성으로 독자와 관객들을 '믿기 힘든 세계'로 유도해내는가?
영웅은 '태어난다', 전통의 'DC 코믹스'
1935년 창립된 'DC 코믹스'는 'Detective Comic'을 줄인 회사명처럼, 처음에는 당시 통속장르로 인기가 높던 '탐정물'을 주로 다루는 만화출판사였다. 이어 1938년, 'DC 코믹스'의 자매지인 'Action Comics'를 통해 전무후무한 '수퍼히어로'물 <수퍼맨>이 선보여졌는데, 신예 작가 제리 시겔과 화가 조 슈스터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이 시리즈가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DC 코믹스'는 '수퍼히어로'물 중심으로 사업방향을 전환시켰고, 이듬해에 밥 케인의 <배트맨>, 41년에 윌리엄 몰던 마스턴의 <원더우먼>이 가세하면서 'DC 코믹스'는 최고이자 최대의 '수퍼히어로'물 출판사로 떠오르게 되었다.
모든 '수퍼히어로'물의 근원을 이룬다는 'DC 코믹스'의 만화들은 생각 밖에 간단한 공식으로 성격화되어 있다. 바로, 모든 '수퍼히어로'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 대공황에 시달리던 당시의 미국 대중들에게 '우리 안에서 탄생한 히어로'라는 것은 오히려 설득력이 없었고, 전혀 다른 곳, 우리보다 탁월하게 우수한 문화권에서 온 '로열 패밀리'급의 인물만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다소 초월적인 기대가 이런 기묘한 설정을 부추긴 셈이다.
예를 들어, '수퍼맨'은 아예 '인간'이 아니다. '크립톤' 행성에서 날아온 '외계인'이자, 그 별의 '왕자'격인 인물이었고, 지구에 도착한 순간 - 당시엔 아직 아기였다 - 부터 이미 '수퍼히어로'였다. '원더우먼'은 버뮤다 삼각지대에 위치한 신비의 섬, '파라다이스'의 공주이며, '파라다이스' 섬 내에서 아마존족은 모두가 초능력자이다 - 이 초능력을 섬 밖에서도 이용하기 위해 힘을 유지시키는 '벨트'를 착용한다는 설정이 더해져 있다. 한편 '배트맨'의 경우, '배트맨'의 가면을 쓰는 브루스 웨인은 비록 외계인이나 초능력자는 아니어도 어마어마한 대부호이자 유명인사로 설정되어 있는데, 대공황 당시에 '부자'란 이미 '수퍼히어로'에 가까운 존재였음을 감안해 볼 때, 역시 태생적 요인이 출중한 인물만이 영웅이 될 수 있다는 'DC 코믹스'의 방향성에서 그닥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은 듯 보인다.
이처럼 철두철미한 'DC 코믹스'의 '태생적 영웅' 모드는 60년대 이후 점차 매력을 잃어가, '수퍼히어로'에 대한 상징적 케이스로만 언급되었는데, 90년대 중반부터 일기 시작한 '팝컬쳐 재해석' 붐을 타고 다시 등장하여 여러 흥미로운 분석의 주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를테면, '외계인'으로서의 '수퍼맨'의 딜레마에 대한 탐구 -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킬빌 Vol. 2>에서는 한 등장인물이 '킬러'로서의 페르소나를 말하면서 '영웅 수퍼맨이 자신의 본래 페르소나이고, 평범한 인물 클라크 켄트가 가면성 페르소나'인 상황을 언급한다 - 가 벌어지는가 하면, 숨겨진 욕망의 분출구로서 '밤의 영웅'이 된 브루스 웨인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접근, '강력한 힘에 뒤따르는 치명적인 약점'이라는 '수퍼히어로'물 공식에 대한 담론 등이 현재까지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 이는 가장 펄프적인 아이템이 가장 깊이있는 인문학적 접근을 가능케 한다는 통설이 맞아떨어지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평범한 인물이 겪는 '수퍼히어로'로서의 고충, 스탠 리의 '마블 코믹스'
'마블 코믹스'의 역사를 말하려 할 때 '스탠 리'라는, 세계 만화사에 길이 남을 인물의 이야기를 절대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스탠 리가 '마블 코믹스'에서 맹활약하기 이전에 '마블 코믹스'에 '수퍼히어로'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캡틴 아메리카>로 대변되는 1930∼40년대의 '마블 코믹스' '수퍼히어로'물들은 그저 'DC 코믹스'의 아류 정도로만 이해되었고, 내용도 애국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1939년, '마블 코믹스'의 전신인 '타임리 코믹스'에 입사해 3년 만에 '타임리'의 주요작가이자 편집위원으로 승진한 스탠 리는, 이런 '마블 코믹스'의 절대부진 시점에, 나아가 '수퍼히어로'물 자체의 퇴조 시점에 극적인 장르의 부활과 '마블 코믹스'의 시장 완전석권을 이룩한 '수퍼스타'이다. 그의 '수퍼히어로'물은 1961년, <판타스틱 포>로부터 시작해 <스파이더맨>('62), <헐크>('62), <엑스맨>('63), <블레이드>('73) 등으로 이어졌으며, 곧 '스탠 리의 역사'가 '수퍼히어로물의 역사'가 되어버리는 절대절명의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스탠 리의 만화들은 'DC 코믹스'류의 '수퍼히어로'물에 비해 확실히 진보한 느낌의 것들이었다. 먼저, 스탠 리의 '수퍼히어로'는 '태생적으로' 영웅이 아닌,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이 극적인 기회를 맞이해 '수퍼히어로'로 둔갑하게 된다는 설정을 기본적으로 공유하고 있으며, 이들이 겪는 '일반인'으로서의 페르소나와 '영웅'으로서의 페르소나가 '일반인'의 마인드 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과정이 섬세하고 깊이있게 다루어져 있어 보다 지적으로 성숙된 1960∼70년대의 대중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 '피터 파커'가 일반인으로서 연인인 '매리 제인'에게 접근하고 싶어도 '스파이더맨'으로서의 능력이 주어진 상황에 책임감을 느껴 갈등하는 테마를 생각해보라.
이 밖에도 스탠 리는 여러 현대적 개념과 갈등을 가장 펄프하다고 여겨지던 '수퍼히어로'물 안으로 불어넣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아분열에까지 이르는 현대인의 갈등을 묘사한 <헐크>, 차별받는 아웃사이더들의 집단이 겪는 여러 고충을 다룬 <엑스맨>, '절반의 흡혈귀'로 태어나 흡혈귀 사냥꾼 역을 맡게되는 엄청난 딜레마를 안고 있는 역사상 최초의 '흑인 수퍼히어로' <블레이드> 등,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선악개념의 기준을 떠난 '수정주의 수퍼히어로물'의 길을 꾸준히 걸었고, 이런 노력은 시간의 세례를 가장 잘 견뎌낸 케이스로 거듭나,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가장 영화화 작업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아이템으로 꼽히게 되기도 했다.
스탠 리는 현재 'DC 코믹스'와 '사상초유의 계약'을 통해 'DC 코믹스'의 고전적인 수퍼히어로들을 자신의 시각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그려내는 독창적인 작업을 진행중에 있다. 과연 스탠 리가 그려내는 '수퍼맨', '배트맨', '원더우먼'의 갈등과 딜레마는 어떤 모습일까.
'수퍼히어로'의 고정관념은 가라! '다크호스 코믹스'
'다크호스 코믹스'는 일반적으로 <스타워즈>, <코난>, <에이리언>, <뱀파이어 사냥꾼 버피> 등, 이미 영화화된 아이템을 만화화시키는 출판사이자, <오! 나의 여신님>을 필두로 한 일본 '망가'들을 수입, 소개하는 출판사로 알려져 있지만, '다크호스 코믹스'의 오리지널 '수퍼히어로'물 역시 주목할 만한 요소가 충분히 있으며, 'DC 코믹스'와 '마블 코믹스'로 양분되어 있는 '수퍼히어로'물 시장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후발주자로서도 의미가 있다 하겠다.
1986년에 창립된 '다크호스 코믹스'의 '수퍼히어로'물은 기본적으로 '안티-히어로'의 성격을 띠고 있다. '다크호스 코믹스'의 대히트작 <마스크>의 주인공 스탠리 입키스는 '마법의 마스크'를 쓰고 '수퍼히어로'로 변신한 뒤, 세상의 악을 처벌하기 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온갖 장난을 일삼고 다니며, <헬보이>의 주인공은 고아원에서 자란 '악마'로서, 묘한 계기로 '악' 대신 '선'을 선택해 '나찌'와 싸우고 있는 뿔달린 괴물이다.
'다크호스 코믹스'는 특별히 '수퍼히어로'라 할 만한 인물이 아닌 경우에도 주인공으로 시리즈를 만들어내곤 하는데, 무정부주의 상태에 놓인 미국의 유일한 자유 도시 '스틸 하버'에서 살아가는 여성 바운티 헌터의 이야기 <바브 와이어>나 연쇄살인 의사였던 아버지의 복수를 꿈꾸는 정신병자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닥터 기글스> 등은, '안티-히어로'의 영역에서 멀리 떠나 아예 '악역'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대담함까지 보여주고 있다.
이런 파격적이고 자극적인 설정을 일삼고 있음에도 '다크호스 코믹스'의 '수퍼히어로'들은 그닥 매력적이지만은 않다. 스탠 리의 주인공처럼 복합적인 사고체계와 섬세한 감정체계를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며, 'DC 코믹스'의 주인공들처럼 색다른 '탐구조건'을 충족시켜주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저 '성인적 요소'의 결합으로 선정주의적 상업성을 챙긴 것일지도 모른다는 인상마저 들고 있는 '다크호스 코믹스'의 '수퍼히어로'들은, 그럼에도 '동세대적 시각의 전격적 도입'이라는 점에서 청소년층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으며, 영화화 역시 활발하게 이루어져 원작의 인지도를 급격히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그 밖의 군소 출판사 출신 '수퍼히어로'
이제는 예전처럼 몇 가지 강력한 매체가 시장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상황도 아니고, 창의력과 아이디어만 좋으면 군소 출판사에서 탄생한 '군소 수퍼히어로'들이더라도 얼마든지 독자층을 확보할 수 있다.
대표적 케이스라면 1992년 '이미지 코믹스'에서 탄생한 <스폰>을 들 수 있다. 미국 정부의 비밀 요원이 작전 수행 도중 사망하고, 지옥에서 악마와 계약을 맺어 얻은 '수퍼히어로'급 능력으로 지상에 돌아와 악을 무찌른다는 설정은 그 자체로 이미 '자극의 극한'에까지 이르러 있는 것이고, '일정시점까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능력을 발휘하다, 악의 군대가 일어설 때에는 다시 악마와 손잡고 선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설정에선 가히 종교적인 논란까지도 불러 일으킬 법한데, 이런 적극적인 도발성 탓에 청소년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얻으며 영화화까지 성공시킨 케이스로 기억되고 있다.
'수퍼히어로'물로서 분류되긴 어려워도 역시 군소 출판사 출신으로 대성공을 거둔 또다른 케이스로는 '말리부 코믹스'의 <맨 인 블랙> 등을 꼽을 수 있고, 이들 군소 출판사 출신 '수퍼히어로'들의 공통점이라면, 기존의 대형 출판사에서 좀처럼 감행하지 않는 논란적인 소재와 자극적인 표현, 극렬한 풍자와 조롱을 동원하여 독자들의 눈길을 잡아끈다는 점 정도를 들 수 있겠고, 최근 들어서는 고도의 철학적 논제와 심리묘사까지 더해, 기존의 '만화독자'층이 아닌 새로운 독자층을 확보해내려 애쓰는 듯 보인다.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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