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북한에서 탈출해 6년간 중국에서 고생을 하다가 2004년 드디어 남한으로 건너온 남자.
북한에 있을때는 '소령'이었지만 남한에 내려와서는 '용접공'이 된 남자.
북한 친구보다 남한 친구가 더 많다는 남자.
남한에 살고 있지만 남한 사람보다 조금은 특별한 인천 새터민 대표 남영기(53·회사원, 이하 남)씨를 '새터민과 함께하는 위안잔치'에서 만나봤다.

기자: 남한에는 언제 내려왔나?
남: 98년 중국으로 넘어가 6년을 지내다가 2004년에 남한으로 들어왔다.
기자: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남:북한에서 내 직업은 군인이었다. 계급은 ‘소령’이었는데 김일성이 죽으면서 나라가 황폐해졌다. 군대의 환경도 너무 열악해서 자급자족하지 않으면 굶어죽을 판이었다. 그런 시기에 군대에서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여기서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98년 감옥에서 탈출해 중국으로 도주, 6년을 보내고 2004년 남한으로 들어왔다.
기자: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이 있는가?
남: 아내와 26세 딸, 20세 아들이 하나씩 있다. 가족들은 감옥에서 내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다.
기자: 북한에 두고온 가족이 가장 많이 생각나는 때는 언제인가?
남: 명절, 휴일 등 혼자 있을 때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생각이 많이 난다. 그래서 휴일에는 교회를 다니면서 가족의 안녕과 건강을 기도하고 있다.
기자: 교회를 다닌다니 의외다? 언제부터 교회를 다니게 된 것인가?
남: 북한 감옥을 탈출해 중국으로 도주했을 때 처음으로 들어간 곳이 교회였고 한국에 들어와서도 국정원에 머물렀을 때도 목사님을 만났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신앙을 알게됐고 교회를 다니면서 사람도 많이 사귀게 됐다.
기자: 남한 친구는 많은 편인가? 편견은 없었나?
남: 북한 친구보다 남한 친구가 더 많다. 처음에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은 스스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생각한다. 나는 남한사회로 나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남한사람들이 잘 하지 않은 일을 직업으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직업학교에서 용접 수업을 받아 과정을 이수해 한진중공업에 당당히 입사했다. 처음에는 차별이 있었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며 내 능력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 했다. 그 결과 남한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고 마음의 문을 열었다. 지금은 함께 낚시도 다니고 술도 마시며 잘 지내고 있다.
기자: 혹시 남한에서도 결혼 생각이 있는가?
남: 지인의 소개로 43세의 중국여성과 국제결혼을 한지 3달 됐다. 그렇다고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잊은 것은 아니다. 통일이 되면 조상이 묻혀있고 가족들이 있는 북한에 가고 싶다.
기자: 오늘 같은 행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남: 서울은 이런 행사가 많은데 인천은 아직 보편화 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도 이런 행사가 계속 이루어져서 새터민의 사회 적응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