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에는 문국현 사장을 기업인으로 거둔 성과를 두고 평가하기 보다는 잠재된 대권주자로서 가능성을 타진하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특히 정운찬 전 서울대총장의 발빼기로 어깨가 축 늘어진 범여권은 문사장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정치권이 문국현 모시기에 열을 올리는 것은 시민사회로부터 존경받는 경영인이라는 매력을 높이 평가해서다. 열린우리당 민병두 의원은 “창조경영·지식경영·인간경영 등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한 인물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불도저 경영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강점을 갖고 있다”고 문사장에 대해 언급했다.
범여권 안팎에서는 이같은 문사장의 메리트를 이용하기 위해 주변 인사들이 이미 사전정지작업에 들어갔으며 의원 일부가 지원을 준비중이라는 소문도 돌고 있다.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 문사장은 지난 6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시민사회는 기존 체제와 다른 전혀 새로운 것을 준비 중”이라며 “시민사회를 충분히 확대·정렬하는 데는 9~10월까지면 적합하다는 분들이 많다”고 밝혀 정치계입문을 시사하기도 했다.
그간 쌓아온 깨끗한 이미지로 시민사회에서, 정치권에서 주목 받고 있는 문국현사장의 행적을 밟아보자.
문국현(58) 사장이 대학 졸업 뒤 유수의 대기업을 마다하고 유한킴벌리에 입사한 것은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싶어서였다. 평생을 바쳐 일군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의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기업가 정신을 이어가고 싶었던 것.
이 같은 이유로 유한킴벌리를 택한 문사장은 입사 이후 각종 부당한 관행에 맞서며 대대적인 경영혁신사업을 벌여왔다. 이 때문에 문국현 유한킴벌리 사장의 이름 뒤에는 ‘혁명가’, ‘뉴패러다임의 전도사’라는 표현이 꼬리표처럼 따라붙는다.
사람과 환경이 중심되는 경영
그가 만들어낸 혁명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일명 유한킴벌리 생산방식이라 불리는 ‘Y-K 모델’이다. 이 모델은 한마디로 근무시간은 줄이면서 생산성은 높이는 방식이다. 흔히 4조 2교대, 혹은 4조 3교대제라 불리며 일자리 나누기의 대안으로 손꼽히는 Y-K모델의 묘미는 초과근로를 없애 충분히 쉬면서 근로자들을 교육시키는 노사 상생 모델이다.
이는 1993년 도입돼 직원들에게 감원공포를 없애면서 평생학습 시스템을 구축해 직원 한 사람 당 3백시간에 달하는 교육기회를 주고 있다. 이를 통해 유한킴벌리의 직원은 지식근로자로 거듭나고 있는 셈이다. 이 모델로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아졌고 회사도 큰 약진을 하게 됐다. 시장점유율이 80%에서 18%로 추락하며 위기감이 고조되던 유한킴벌리는 이 제도를 도입하고 불과 몇 년 만에 시장점유율, 품질 등의 부문에서 일류기업으로 도약하게 됐다. 지식 근로자가 된 직원들이 생산성과 품질을 크게 개선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사장이 원하는 ‘지식 근로자’는 그가 추구하는 인간존중의 경영이념과 일맥상통한다. IMF 시절 모든 회사가 인원감축으로 인건비를 절약할 때 그는 사람을 해고하는 대신 기계를 해고했다. 문사장은 이에 대해 “4개의 생산라인 중 오래된 기계를 중단하고 그 인원을 다른 생산라인에 합류해서 근무조를 늘리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유한킴벌리 직원들은 12시간씩 4일을 일하고 다음 4일은 휴식을 취한다. 그는 “과로사회를 학습사회로 바꾸면 일석 이조다”라고 말한다. 건강을 지키면 직원 자신뿐만 아니라 가정도 건강해지고, 평생학습을 통해 끊임없이 자기를 바꾸는 지식과 기술로 자신을 혁신해 가면서 사회적 역할도 축전된다는 것. 또한 끊임없는 직원교육을 통해 한 시간에 제품 1만5천개를 만들던 기계가 4만개까지 만드는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문사장은 “기계 한 대가 기계 세대의 효과를 보는 것이다. 인건비를 아끼는 것보다 몇 배나 더 많은 기계설비 비용을 줄이고 있고 이것이 평생학습의 결과다”라고 말했다. 이것이 곧 유한킴벌리 생산방식인 Y-K모델의 비밀을 푸는 열쇠인 셈.
문사장은 Y-K모델을 확대해 ‘사람입국’이라는 뉴패러다임을 제안하기도 했다. 유한킴벌리와 같은 성공사례가 많아지면 근로자의 삶의 질과 기업의 경쟁력을 동시에 높일 뿐 아니라 일자리나누기에 의한 고용창출, 고질적인 노사갈등, 장시간 근로자문제 등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여러 현안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패러다임이 된다는 것.
이처럼 갖가지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고 있는 Y-K모델은 현재 국내 18개 회사가 정부 예산을 지원받아 따르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산하 뉴패러다임센터를 개설해 유한킴벌리 모델을 다른 기업에도 확산토록 한 것이다. 삼성전자, 포스코, 풀무원 등 대기업들이 이미 이 모델을 채택해 안정적인 궤도에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아시아 최고의 일하기 좋은 기업’으로 자리매김한 유한킴벌리는 파이낸셜 타임스를 비롯한 해외 주요 언론이 뜨거운 관심을 가진 바 있다.
이 같은 혁신의 궁극적 목표는 결국 사람을 중시하는 ‘사람경영’에 있다.
문사장은 경영자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기도 하다. 20여 년째 계속하고 있는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캠페인은 물론 1998년 시작된 ‘생명의 숲 가꾸기 운동’을 비롯, 그가 활동하고 있는 시민단체만도 여러 곳이다. 그가 숲과 환경의 소중함에 눈을 뜬 것은 1980년대 초반. 1982년 미국, 호주 등 환경 선진국을 다니며 그 나라의 숲을 눈여겨 본 문사장은 자연이 풍요로운 나라가 선진국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때부터 숲과 환경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고 한국에 오자 마자 빈 땅을 찾아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우리강산 푸르게 푸르게 라는 캠페인이 시작된 것도 이때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개념조차 알려지지 않았던 당시, 사유지뿐만 아니라 국유지까지 나무를 심는 그의 행동에 주주들은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그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고 이 캠페인은 유한킴벌리의 상징이 됐고 국내의 대표적인 환경기업으로 각인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1985년부터는 신혼 부부를 대상으로 나무 심기 운동을, 1988년에는 숲속 학교인 그린 캠프를 시작했다. 동북아산림포럼 공동대표인 그는 중국과 몽골 지역의 사막화를 막는 조림 녹화 사업과 북한에 묘목과 비료 등을 전달하는 ‘평화의 숲 운동’도 펼치고 있다.
유한킴벌리는 지난 20년간 산림조합중앙회 산하 숲가꾸기 조성 운영 위원회에 43억원을 기탁했으며, 이 기금으로 국유지 2천여 평에 나무 2천만 그루를 심었다. 문사장은 은퇴 후에도 아름다운 숲을 찾아다니면서 시민운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한다.
위와 같이 문국현 사장의 경영철학은 크게 ‘사람중심경영’과 ‘사회적 책임’으로 요약된다.
이처럼 수년에 걸쳐 쌓아온 기업이미지와 문국현 사장 본인의 이미지가 정치권을 매료시켰고 끊임없이 러브콜을 보내게 만든 힘이 된 것이다.
이에 문 사장은 “지도자라면 기업이나 가정보다 먼저 국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며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지만 안 된다면 본인이 희생할 수 있다”라고 말해 정치계 입문에 뜻이 있음을 나타내기도 했다.
특히 문사장은 지난달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의 대선포기선언으로 한층 더 주목을 받고 있는 상태다. 범여권의 유력대선주자로 거론돼 왔던 고건 전 총리와 정 전 총장의 중도하차로 문사장을 세 번째 외부선장으로 내세우자는 기류가 확산되고 있는 것. 문사장을 바라보는 범여권내의 시각도 대체로 호의적이다. 민생정치모임 소속 최재천 의원은 “훌륭한 환경·노동정책을 가진 분”이라고 평가하면서 “부채의식을 가지고 정치권으로 와서 제대로 된 정책을 발휘하고 실천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호감을 나타냈다.
문사장에 대한 시민사회의 평가도 크게 다르지 않다. 환경·윤리경영·뉴패러다임 운동을 함께 해오면서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충분한 자질을 가진 재목 중 하나”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이에 대해 문 사장은 지난 3일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정 전 총장께서 그만두셨다고 해서 아무런 준비 없이 불쑥 나서는 건 적합하지 않다”면서도 “가능성을 완전히 닫아둔 것은 아니다”라고 진전된 입장을 밝혔다. 그는 “시민사회가 9, 10월 전까지 새로운 정당을 만들면 합류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 분들의 나라 걱정에는 공감한다”며 “그러나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라고 말했다. 서두르지 않겠지만 정치 참여를 검토할 수 있음을 시사한 대목이다.
그러나 범여권은 다소 조급하다. 열린우리당의 개혁 성향 초선 의원 10여명이 문 사장 등 외부 주자를 지원하기 위해 20일 전후에 탈당할 것이란 얘기도 있다. 최열 환경재단 대표와 ‘통합과 번영을 위한 미래구상’의 정대화 집행위원장 등 시민사회세력도 문 사장 띄우기에 적극적이다.
낮은 인지도, 정치경험결여가 문제
그러나 문 사장이 여권의 새로운 희망이 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고 전 총리나 정 전 총장보다도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진다는 평가 때문이다. 또 검증되지 않은 외부인사를 두고 성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위험하다며 조심스런 태도를 취하는 이들도 있다. 정계를 경험하지 못한 문사장이 현실정치에서 오는 이질감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나타내고 있는 것.
이처럼 문사장의 정치권입문에 대한 상반된 시각이 나오는 가운데 범여권 안팎에서는 문 사장이 그동안 함께 활동해온 교수·엔지오·환경그룹과 대선출마에 대한 밀도 있는 논의를 해왔다는 얘기가 흘러나온다. 여기에 더해 문 사장의 결심은 정치를 하는 쪽으로 굳어지고 있으며, 그 최종 결정은 이번 달을 넘기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
그가 정치계에 발을 담글 것인지, 그 시기가 언제가 될지는 아직 미지수다. 그러나 문사장의 검증된 경영자적 능력과 정치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에 기대고 싶은 국민들의 마음이 존재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기업인으로, 그리고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앞날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