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화된 '책', 그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의인화된 '책', 그 기구한 운명에 대하여
  • 이문원
  • 승인 2004.07.07 1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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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란 지브코비치의 <책 죽이기>
불과 십수년 전만 해도 '책 도둑은 도둑도 아니다'라는 말이 돌기까지 했건만, 근래 들어 '책'만큼 위상이 떨어지고, 대중들과 거리가 멀어진 문화적 아이템도 없을 듯 싶다. 지금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이자 책을 잃을 '필요'가 없는 시대. 즉각적인 영향과 효과를 발휘하는 실용서적만이 '가까운 목적'을 위해 읽혀질 뿐, 제반적인 이성과 정서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문학 서적들은 찬밥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무시당하고 때로는 '혐오'당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런 '책'의 대수난기에, 유고슬라비아의 작가 조란 지브코비치의 소설 <책 죽이기>는 남다른 의미로 읽혀지고 있다. <책 죽이기>의 주인공은 이런 '절망의 시대'를 살고 있는 의인화된 '책', 본인이다. 지브코비치는 책의 탄생을 인간의 '출산' 과정처럼 그려내며, 책의 어머니로 작가를, 조산원으로 편집자, 교정원, 타자수, 식자공 등을 설정하고 있는데, 특히 책들이 모여 사는 도서관을 사창굴로 묘사하고, 폐기처분되는 책들의 모습을 학살현장처럼 묘사하는 부분 등에선 우리에겐 낯선 작가인 그의 지독스런 블랙-유머 감각과 세태 풍자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책'을 '여성'으로, 그를 둘러싼 이해관계자들을 '남성'으로 설정하여, 남녀간의 성적 대립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묘사하고 있는 부분 또한 주목할 만하다. 결국 지브코비치는, 책이란 '멸종 위기 직전에 처해 있는 종'이라는 무겁고 신랄한 결론으로 독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슬픈 점은, 이것이 사실 '위협'이 아니라 객관적인 '현실인식'일 뿐이며, 우리에겐 이 멸종위기의 종을 되살려낼 능력도, 의지도 없는 듯 보여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지브코비치가 예언한 '책'과 '인간지성'의 멸종을 과연 어떤 식으로 막아낼 것인가? 물론, 이 책에는 '책을 죽이는' 방법만 나와있을 뿐, '되살리는' 방법에 대해선 적혀있지 않다. 오래된 묵시론적 예언서들이 으레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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