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 좋아 어려운 길을 선뜻 나섰습니다"
"돌이 좋아 어려운 길을 선뜻 나섰습니다"
  • 이문원
  • 승인 2004.07.09 2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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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석 조형물 연출가 '남이 장재열'
'조합예술'. 언뜻 익숙치 않은 예술 장르이다. 이미 존재하는 자연물 등을 새로 재단하지 않고, 원래 모습 그대로를 보존하며 이를 '조합'만하여 새로운 형태의 창작물로 만들어내는 독특한 예술 형태를 가리키는 말인데, 언뜻 '신종 예술' 형태로 인식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전세계 모든 민족에 걸쳐 그 '역사'를 돈독히 하고 있는 인류 최초의 예술 형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최초의 건축 소재인 돌, 나무, 흙 등을 이용한 움막, 돌담, 탑 등을 들 수 있으며, 현대의 '재단된 문화', 콘크리트, 창작자의 주문대로 연마시킨 각종 재료들에 지쳐버린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대안으로서 이 '원형 예술'의 형태가 환영받고 있는 것. "운명적으로 돌에 심취하게 되었다"는 남이 장재열 작가 역시, 아직 국내에서는 그닥 활성화되지 이 '조합예술'의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 작가이다. '자연석 조형물 연출가'라는 독특한 타이틀로 불리우긴 하지만, 본인은 "그저 돌이 좋아 돌만 붙들고 사는 사람"이라 담담하게 자신을 소개하는 그는, 대중적이지 않은 예술 형태를 추구하는 여러 작가들이 그러하듯, 사뭇 독특하고 '의외의' 경력을 지니고 있는 이이다. 본래 식품제조업체를 경영하던 '사업가'였던 그는, '돌'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으로 사업체를 정리하고 전문 수석인의 길을 걷게 되면서부터 '남들이 걷지 않는 길'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수석은 30여년 전, 작고한 친형과 선배 등, 주변인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입문하게 되었습니다. 전문수석인이 되어 '남도수석전시관'을 운영하면서, 수석교실을 열어 수석이론을 강의하기도 하고, 수석관련서적도 발행하는 등, 나름대로 열과 성을 다해 '수석사랑'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런 그가 돌을 이용한 '조합예술'의 길을 걷게 된 것은 14년 전. 수석일을 통해 인연을 맺게 된 일본 수석계 지인들과 수석계 선배인 오규배씨의 영향을 받아, '어느날 문득' 자연석을 소재로 한 조합예술 창작에 착상을 하게 되었다는 그는, 곧바로 '남이 미석 연구소'를 설립하고 현재까지 14년의 긴 세월동안 고집스럽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초창기에 국내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등지를 수차례 오가며 기술과 견문을 배우고 넓힌 그는, 이 '어려운 외길'을 꾸준히 걷게 된 사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한동안은 건설업체를 경영하며 제가 하는 일의 수익성에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엄청난 재산이 있어 돈을 펑펑 써가며 저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요. 일단은 수익성에 대한 가능성이 엿보여 이 일에 뛰어들었지만, 저도 모르게 점점 수익성이 떨어지는 일, 보다 더 어렵고, 고차적이며, 도전적인 일에만 몰두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 이게 바로 장인정신이라는 것이구나' 싶었죠. 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 이상, 자신을 속이면서 살 수는 없었고, 결국 사업체 및 사회활동, 인관관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지루하고 외로운 '장인'의 외길 인생을 걷게 된 겁니다" 정말이지 '예술가'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인물이 자신의 잠재된 '예술혼'을 깨닫고 걷게 되는 고독한 인생의 전형을 보는 듯한 '인생사'일진데, 여기서 잠시 장재열 작가가 외곬으로 매달리는 '조합예술'의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먼저, 장재열 작가의 일은 바닷가, 강가 등을 두루 다니며 '돌'을 채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바닷가나 강가의 돌은 '색'이 다릅니다. 밝은 색과 어두운 색의 조화가 적절히 이루어져 있고, 자연미의 면에 있어서도 훨씬 돋보이죠. 이 돌들을 색상과 크기, 모양새에 맞게 하나하나 채집하는데, 제가 손수 다니며 고르고 있기에 시간이 많이 걸립니다" 그러나 이후의 작업은 이보다 훨씬 까다롭고 복잡하다. 사실, 믿기 힘들 정도에 가깝다. 떠오른 영감대로 미리 스케치를 잡아놓은 '조형물'의 형태에 맞게 이 돌들을 배치하는 작업이 바로 그것인데, 여기서 '자연물을 재단하지 않는다'는 장재열 작가의 조합예술 이론이 커다란 난제로 작용한다. 이 돌들을, 생각해놓은 형태에 맞춰 배열하되, 전혀 재단하지 않고 서로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부분을 골라 물샐틈 없이 배치시킨다는 것이다. 여기에, 단순히 아귀가 맞는다고만 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작품의 균형과 미를 생각하여 두루 자연스럽게 배치되도록 돌들을 구성시켜야 하기에 노력은 배로 든다. "한 마디로 '손이 엄청나게 가는' 작업이죠. 시간도 오래 걸립니다. '탑' 같은 규모도 3개월, '묘원'을 작업했을 때에는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그것도 제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하기 때문에 동시에 여러 조형물을 함께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라, 한 작품에만 매달려서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어렵고 고달픈 작업이어서 그런지, 함께 일하던 수제자들도 하나둘씩 떠나고, 이제는 다시 저 혼자만 남았습니다. 그 정도로 힘겨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탄생시킨 작품들은 '자연'과 '예술'이 만난 독보적인 성취였다. 전남 보성군의 '서재필 박사 기념 공원', 경남 산청군 '성심원'의 '납골묘원', 광주 '해원정사'의 '자연석 탑' 등이 그의 노고에 의해 탄생된 작품들이며, 그 미적 성취와 더불어 '자연을 존중하며 자연의 미를 새롭게 정립한다는' 방향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예술적 요소가 독보적인 영역을 구축해낸 한국 예술사의 새로운 결실이었다. 현재 광주 '해원정사'에서 '낙태아 위령탑'으로 제시된 원통형 자연석 탑을 건립 중인 장재열 작가는 작품 제작시 '출혈 공사'까지도 감수하며 뛰어드는 점에 대해 기자가 묻자, 되려 "앞으로는 영리성 있는 일반공사 수주는 가능하면 아예 배제하고 싶습니다. 저 자신이 추구하는 작품, 시대적 문화유산으로써 가치가 있는 공사에만 몰두하고 싶은 바램입니다"라며, "어차피 '천직'으로 여기고 있어, 이런저런 고생 쯤은 각오하며 산다"는 대답으로, '장인'의 영역마저도 초월한 듯한 '천직 예술가'의 여유로움을 보여주었다. 장재열 작가는 잠시 자신의 호 '남이(南 )'에 대해 긴 설명 - ' '는 '흙다리'를 가리키며, 흙다리처럼 보기에는 하잘 것 없지만 건너는 사람의 수고를 덜어주고, 편리함을 제공해주는 역할로써, 남을 위한 삶을 가고 싶다는 본인의 의지가 담겼다 한다 - 을 읊조리더니, 앞으로의 소망에 대해 나지막히 말했다. "앞서 말했듯이, 제자들이 자꾸 '고된 일'을 견디지 못하고 나가버리는 점이 아쉽고 가슴 아픕니다. 고집과 열정, 성실함을 갖춘 제자들을 맞아들여 같이 연구하면서 일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아무래도 혼자서만 하기엔 벅찬 작업인게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정신도 중요하지만 '몸'의 건강도 참 중요한 작업이기에, 몸과 마음이 항상 건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저와 제 작품이 저 살아 생전에는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사후에는 나름의 인정을 받았으면 합니다. 아직 전세계 어느 곳에서도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예술 형태이므로, '조합예술' 형식의 정립과 보존에 제 역할이 더해졌으면 하는 겁니다" 남이 장재열 작가의 타고난 열정과 고집, '운명'에 순응하며 초탈한 듯 여유로운 풍모를 보고 있자면, 그닥 멀기만 한 소망은 아닌 듯 싶기도 하다. 취재 이문원 기자 fletch@empal.com 사진 임한희 기자 lhh@sisafocu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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