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Y대를 나온 방송사 PD’로 사칭하며 고학력 전문직 여성에게 접근해 사기 행각을 벌여온 30대 남성이 경찰의 수배 중에 있다. 범인은 고졸 출신에 아내와 초등생 딸이 있는 유부남이란 사실을 숨긴 채 결혼약속을 빌미로 성관계를 맺고 금품을 빼앗는 수법으로 무려 20여명의 여성들을 농락했다. 게다가 범인은 전과 5범에 혼인빙자간음 외에도 다른 7건 이상의 사기 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밝혀져 피해 여성들을 아연실색하게 했다. 하지만 피해 여성들이 피해 사실을 밝히는 데 꺼려하고 있어 사건이 많이 축소된 상태다. 이에 따라 경찰은 피해 여성들의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고 나섰다.
스포츠카 타고 다니며 재력가 행세, 부모 대행해 상견례까지
교사, 패션디자이너 등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만 20여명 피해
장씨(35)는 ‘돈 많은 방송국 PD’와 결혼하려다 돈은 물론 순결까지 빼앗겼다. 예비신부의 풋풋한 꿈마저 앗아간 장본인은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드라이빙 해외여행’이라는 카페를 통해 만난 성씨(35)였다. 장씨는 카페 게시판에 올려진 성씨의 프로필과 사진을 보고 호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장씨의 악몽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휴대폰 통화내역으로 덜미
“Y대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방송사 PD로 일하고 있다”는 성씨를 철석같이 믿어버린 장씨. 둘은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넘지 말아야할 선까지 넘고 말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씨가 장씨에게 부탁을 해왔다. 장씨의 명의로 휴대폰 하나를 개통 해달라는 것. 1인당 4개의 휴대폰이 개통 가능하지만 “직원들에게 자신의 명의로 휴대폰을 해주는 바람에 정작 본인은 휴대폰이 없다”며 “당분간만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장씨는 아무 의심 없이 자신의 이름으로 휴대폰을 개통해 성씨에게 건네줬다.
그러나 성씨의 부탁은 날이 갈수록 하나 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성씨 주머니에 들어간 장씨의 거액이 몇 차례. 의심이 들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장씨는 성씨를 추궁하기 시작했다. 연락이 뜸해지면서 성씨가 다른 사람을 만나는 듯한 기분에 휩싸이게 된 장씨. 이후 성씨는 장씨에게 청혼을 했고 양가 상견례를 통해 결혼 준비에 돌입하면서 장씨는 성씨에 대한 의심을 버렸다. 그런데 또 다시 성씨가 돌연 연락두절이 됐다.
다급해진 장씨는 성씨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일단 성씨가 그 동안 장씨의 명의로 사용해 온 휴대폰 통화내역서를 발급받아 일일이 전화하기로 했다. 이로 인해 장씨는 정성욱, 송인호, 박경식, 성민권 등 다수의 가명을 사용하며 다른 여성을 함께 만나온 사실을 밝혀냈다. 그뿐이 아니었다. 피아노 강사, 대학 강사, 미국 뉴욕에서 대학을 나온 패션디자이너, 고등학교 교사 등 장씨와 같이 피해자로 주장하는 고학력 전문직 여성들만 20여명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 동안 성씨는 ‘이클립스’라는 스포츠카를 타고 다니며 재력가 행세를 해왔다. 또 성씨는 모 대선 후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그 후보의 일대기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적이 있다고 피해 여성들을 속여 왔다. 결혼 약속을 할 때는 역할대행업체에서 가짜 어머니를 소개받아 상견례에 참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씨는 피해 여성들과 함께 성씨의 집을 방문하고 그의 부모를 만났으며 이로 인해 성씨가 아내와 초등생 딸이 있는 사실까지 확인했다. 게다가 성씨는 Y대 앞에서 액세서리 노점상을 한 적이 있었을 뿐 Y대는커녕 고졸 출신에 전과 5범의 파렴치범이었다.
하지만 정작 성씨의 행방은 찾을 수가 없었다. 성씨의 부모들은 성씨를 ‘내 논 자식’ 취급하며 ‘나몰라라’ 할뿐 사건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보였다. 장씨를 비롯한 2명의 피해여성은 사건이 해결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자 결국 경찰에 신고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피해 여성 “쉬쉬” 제보 없어
서울 강서경찰서는 4월 초 잠적해버린 성씨를 수배하고 추적 중에 있다. 강서경찰서 경제1팀 관계자는 “지난 4월 중순에 격일로 혼인빙자간음 3건이 접수돼 수사 중에 있다”며 “성씨의 신원을 조사한 결과 혼인빙자간음 외에 다른 7건 이상의 사기 혐의를 받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경찰 조사 결과 3건의 피해여성들이 성씨에게 빼앗긴 돈은 총 3천여만원. 하지만 경찰은 피해사실을 밝히기를 꺼려하는 여성들까지 합하면 피해자는 물론 피해액수도 상당할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성씨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건의 성격상 피해 여성들이 사건을 밝히는 대신 감추려하고 있다”며 “피해 여성들끼리 서로 연락을 취하며 피해 사례와 기타 정보를 주고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결정적으로 제보가 없어 수사에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해 여성들이 적극적으로 대응한다면 이번 사건에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