옐로우 페이퍼와 함께 스러진 고도성장사회의 뒤안길
옐로우 페이퍼와 함께 스러진 고도성장사회의 뒤안길
  • 이문원
  • 승인 2004.07.13 18: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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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썬데이 서울>
한국의 30, 40대 남성이라면 '썬데이 서울'이라는 옛 잡지의 제호에 흐믓한 표정을 지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고도성장기, 아직 인터넷도 없고 언론매체도 많지 않아 '자질구레한' 선정성 기사들을 접할 수 없었던 시절, '썬데이 서울'은 대중들의 '저속하다'고 말해지던 욕구를 채워준 대표적인 옐로우 페이퍼였고, 청춘기의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처럼 여겨졌던 기묘한 잡지였다. 그러나 고도성장기가 마침내 꽃을 피우고 이 나라 사람들이 다들 '왠만큼 먹고 살' 수준이 되었을 무렵, 대중들은 높아진 자신의 사회적 위상에 걸맞는, 보다 더 품위있는 매체를 선호하기 시작했고, 결국 '서민 취향 옐로우 페이퍼'인 '썬데이 서울'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고도성장기의 과오들이 하나둘씩 터져나와 자신만만했던 우리의 사회/경제 시스템이 붕괴되고, 그 어떤 '감내의 시기'보다도 더욱 고통스런 상황을 겪고 있는 지금, '썬데이 서울'의 추억은 또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썬데이 서울'을 읽던 시절은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실마리를 읽을 수 잇는 시기였지만, 풍요의 감미를 맛보고 난 뒤 그 풍취만이 남아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썬데이 서울'이 없는 오늘은 과연 어떤 종류의 정서를 대변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 현재 20대 여배우들 중 가장 독특한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다 평가되는 '배두나'의 출연으로 한창 화제를 모으고 있는 연극 <썬데이 서울>은 바로 이, 기댈 곳 없는 '스러진 품위'의 시대를 읽어내고 있다. 생계를 위해 냄비를 팔다 거렁뱅이가 되어 거리를 떠도는 병호, 아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보험사기를 계획하는 종학, 사랑하는 남자의 아내를 위해 범죄에 가담하게 되는 연변 출신 창녀 정자...이 고통스런 시대를 몸부림치듯 살아가는 이 세 주인공의 이야기는, 언뜻 그간 접해왔던 몇몇 '리얼리즘' 표방 연극들에서 자주 접해왔던 소재처럼 여겨지지만, 여기서 색다른 주목을 기울어야 할 부분이 있다. 바로, <썬데이 서울>은 영화계에서 이름을 알린 '영화계 수퍼스타'들에 의해 씌어졌다는 부분 말이다. 최근작 <올드 보이>로 깐느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의 영예를 안은 박찬욱 감독, <휴머니스트>,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로 독특한 세계관을 보여준 이무영 감독, 그리고 <배니싱 트윈>을 연출한 윤태용 감독이 함께 써낸 <썬데이 서울>은, 이들이 지닌 공통분모, 즉 '현실'에 대한 날 선 인식과 절대 감상주의에 빠져들지 않는 블랙-유머 정신이 과연 '희곡'이라는 낯선 장르 내에서 어떤 식으로 드러나게 될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연극팬들이라면 <지피족>, <아스피린>, <쥐> 등의 작품으로 자유분방한 상상력과 재기를 보여준 박근형의 연출에 주목할 듯 싶다. (장소: 설치극장 정미소, 일시: 2004.07.15∼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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