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여름, 소박한 무대, 잔잔한 미소
뜨거운 여름, 소박한 무대, 잔잔한 미소
  • 이문원
  • 승인 2004.07.20 17: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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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밀가루와 택시>
더운 여름, 장마가 끝나자마자 폭염이 줄을 잇고, 이젠 날카로운 이성이니 복합적 사고니 하는 관념들도 지쳐 그저 넋놓고 이 고통의 계절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심정, 누구나 같을 듯 싶다. 극단 청춘좌의 창단공연작품 <밀가루와 택시>는 바로 이런 시기에 가장 어울리는 연극일 것이다. 이 연극이 새롭게 신선한 감수성으로 관객들의 뇌리에 파문을 던져준다던가, 절대적인 무게감으로 '이열치열'의 기분을 느끼게 해준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어찌보면 <밀가루와 택시>는 안일하기 짝이 없는 기획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한바탕 대소동을 벌이고 떠나간 '복고 열풍'에 기대고 있는 <밀가루와 택시>는, 극중 등장하는 DJ '이준'의 캐릭터를 통해 극의 전개과정 내내 송골매의 '어쩌다 마주친 그대', 이문세의 '파랑새', 노고지리의 '찻잔' 등, 귀에 익숙한 '흘러간 가요'들을 제공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노스탈지아에 푹 젖은 상태에서의 관람을 유도하고 있다. 다루는 이야기 자체도 고등학교 시절부터 30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은경'과 '기현', 두 주인공이 펼치는 아슬아슬한 '인연'과 짝사랑의 아픔, 가치관의 대립 등, 지나치게 자주 밟아 이제 완전히 평지가 되어버린 '사랑의 긴 갈등구조'를 평이하게 담아내고 있어, 어딘지 '뒷북'을 치는 것 같다는 인상마저 주고 있다. 그러나 <밀가루와 택시>는 그 평이함, 안일함,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이야기 구조에 의해 오히려 탄력을 받아 이 찌는 계절에 딱 적합한 연극으로 멋지게 변신하고 있다. 바로, '소박함'이라는 것, 그리고 '평이함이 주는 편안함'이 그것이며, 모험을 하지 않는 대신 잘근잘근 씹어내듯 감칠맛이 넘치고, 더 깊이있게 탐구하지 않는 만큼 가볍고 시원스럽다. 그 누가 어렵고, 복잡하고, 원대한, 혹은 오리지널리티의 극단에 이른 작품들만이 가치를 지닌다 했던가? '관객을 위한 연극'이란, 때로는 뒤로 돌아 오래된 공식을 답습하는 과정에서도, 철지난 트렌드의 뒷북에서도, 때로는 공연되는 상황 - 계절, 시사적 문제, 날씨까지 포함한 모든 것 - 과 예기치 못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과정에서도 탄생될 수 있음을, <밀가루와 택시>라는 자그마한 연극은 그 아기자기한 구성을 통해 속삭이듯 들려주고 있다. (장소: 대학로 단막극장, 일시: 2004.06.3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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