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1일 정치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최근 노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법 9조의 공무원 선거중립 의무조항을 위반했다”고 결론지은 것에 대한 반발이다. 현역 대통령 초유의 헌법소원 청구 이후 노 대통령은 농업인 단체장 및 농업 CEO와의 간담회에서 “후진적 제도를 가지고 후진적 해석을 하고 있다”며 선관위의 결정을 맹비난하기도 했다. 지난 6월2일부터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에 여러 가지 노림수가 숨어 있다는 분석이 정계를 돌고 있다. ‘참평발언’부터 헌법소원 제기에 이르기까지 끝나지 않은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을 알아보고 그 안에 숨겨진 노 대통령의 의중과 정치적 계산을 짚어봤다.
선관위 “노 대통령 발언,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 위반”
청와대 “선관위 결정 존중…그러나 대통령 입 봉하는 것”
노 대통령…위기 때마다 살려온 양자 대결구도 다시 활용
‘헌법소원’ 제기…법률적 최종 판단 헌법재판소로 넘어가

계속되는 정치 발언
노 대통령은 지난 6월2일 참여정부평가포럼 강연에서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끔찍하다”며 한나라당의 신경을 건드리는 발언을 시작했다. 이어 한나라당의 이명박, 박근혜 후보에 대해서도 “제정신이라면 대운하에 투자하겠느냐”, “한국의 지도자가 ‘독재자의 딸’이라고 해외 신문에 나면 곤란하다”는 등 독설을 퍼부었다.
한나라당은 ‘발끈’해 즉각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선관위가 ‘참평발언’을 사전선거 운동이라 볼 수 없다고 결론을 내림에 따라 쓴 잔을 마셔야 했다. 참여정부평가포럼에 대해서도 선거법상 금지된 사조직이 아니라고 결정되면서 제대로 얻은 것 없이 물러서야 했다.
그나마 챙긴 것이 있다면 선관위가 노 대통령의 ‘참평발언’을 사전선거 운동이라는 점에서는 고개를 저었지만 공무원 중립의무 조항은 위반했다고 보고 중립을 지켜줄 것을 노 대통령에게 요구했다는 점 정도이다.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는 했지만 노 대통령은 정치적 발언은 멈추지 않았다. 노 대통령은 선관위의 결정 이후에도 6월8일 원광대 특강과, 6월10일 6·10 민주항쟁 기념사, 그리고 6월14일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밝히길 주저하지 않았다.
원광대 특강에서는 “이명박씨가 내놓은 감세론의 6조8천억원이면 우리가 교육 혁신할 수 있고 복지 수준 한참 끌어올릴 수 있다. 이런 감언이설에 절대로 속지 말라”거나 “독재자의 딸과 (연정을) 할 수 있느냐고 했는데 합당하는 것과 연정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합당과 연정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니 제가 얼마나 힘이 들겠나”는 등 다시 이명박, 박근혜 후보를 겨냥한 거침없는 발언을 했다.
또한 6·10 민주항쟁 기념사에서도 “개발독재의 후광을 빌려 정권을 잡으려 하고 있다”며 한나라당에 날을 세웠고 한겨레 인터뷰에선 “열린우리당에서 선택된 후보를 지지한다”고 특정 정당 지지 의사를 밝혔다.
선관위는 원광대 특강과, 6·10 민주항쟁 기념사, 한겨레 신문 인터뷰까지 3건에 대해 ‘공무원의 선거중립 의무를 위반했다’는 결정을 내렸다. 선거법 위반에 대해서는 ‘판단 유보’라고 말했지만 4번째 경고인 만큼 다음번엔 ‘레드 카드’를 주의하라는 메시지를 풍겼다.
선관위의 결정에 노 대통령은 납득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선관위의 결정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일일이 선관위에 물어보고 말을 해야겠다”는 볼멘소리와 함께 6월21일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이후 천호선 대변인은 정례 브리핑을 통해 “선거중립의무 위반을 결정한 선관위의 준수요청으로 인해 국민으로서 정치적 표현의 자유가 침해됐다는 이유로 헌법소원을 제기했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 뭘 노리나?
정치권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과 한나라당의 반응, 선관위의 결정까지 모두 노 대통령의 정치적 계산에 포함돼 있다고 분석 하고 있다. 앞에서 보여 지는 설전보다 중요한 정치적 노림수를 읽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정계 인사는 “노 대통령은 정치 고단수”라며 “이미 2003년과 2004년 선관위로부터 지적을 받은바 있는 노 대통령이 단순히 답답한 속내를 풀어놓기 위해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서는 ‘참평발언’을 한나라당을 끌어내기 위한 ‘미끼’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을 위기 때마다 살려온 양자 대결구도를 다시 활용하려 한다는 것이다.
의도적인 비난으로 한나라당의 반발을 이끌어 내고 이명박, 박근혜 후보에 대한 비판으로 굳어져가는 대선 구도를 흔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노 대통령이 발언에 한나라당은 대응을 하겠지만 ‘탄핵’을 들고 나왔다가 역풍을 당했던 전례가 있어서 마지막까지 노 대통령을 몰아치지 못할 것이라는 점도 노 대통령의 계산에 포함됐을 거라는 것이 정계의 중론이다.
그는 “이른바 개혁과 보수 간의 편 가르기로 친노세력을 모으고 한나라당 중심으로 흘러가는 대선 흐름을 휘저어 놓겠다는 의중으로 풀이 된다”고 전한다.
노 대통령의 심중은 확인된 바 없으나 노 대통령이 정치적 발언으로 한나라당으로 흘러가던 정국의 열쇠를 쥐게 됐다는 것은 확연하다.
노무현 대통령은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한나라당에 대해 “선거전략은 참여정부와 대통령을 흔드는 것이고 노무현 조지면 자기쪽 표가 온다는 것으로 이미 그만큼 해서 (표를) 많이 갖다 놓았고 그리고 막판에도 참여정부를 흔들고, 공격하면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검증 논란으로 힘겨워하는 한나라당이 청와대와의 겨루기로 시선을 돌리고 세를 결집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청와대와 각을 세우면서 국민의 지지를 이끈다면 노 대통령은 한나라당과 각을 세우며 반한나라당 체제를 확립하고 친노세력들을 결집시키고 있다.
리얼미터에 따르면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도가 소폭 상승, 26.8%를 기록했다. 리얼미터는 이와 관련 선관위의 선거법 위반 결정에 헌법소원을 제기할 것으로 알려지는 등, 정치개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나타내면서 친노 지지층이 다시 결집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열린우리당의 2차 탈당이 예고된 시점에서 그의 ‘참평발언’이 나왔다는 점을 주시하라”며 “노 대통령의 발언은 범여권의 대통합이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한나라당을 견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정권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한나라당을 상대할 수 있는 범여권의 결집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했다는 설명이다. 때문에 노 대통령이 범여권의 통합작업이 빠르고 순조롭게 이뤄질 수 있도록 한나라당의 공세를 막아줄 역할을 자임했다는 것이다.
“선을 정해 달라”
대선이 가까워 옴에 따라 입지를 다지겠다는 의도도 있다.
선관위가 6월7일 ‘참평발언’과 관련해 “대통령의 정치적 활동의 자유에 속한 단순한 의견 개진의 범위를 벗어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로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 위반공직선거법(이하 선거법) 9조가 규정한 공무원의 선거 중립 의무를 위반했다”고 결정하고 자제를 요청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어디까지가 선거운동이고 정치 중립인지 모호한 (선거법 9조의) 구성요건은 위헌”이라고 주장했다.
천호선 대변인도 헌법소원을 제기했다는 것을 알리는 자리에서 “선관위의 조치로 국가공무원법상 정치활동이 인정된 정무직 공무원인 대통령이 공직선거법 제9조에 의해 정치적 표현의 자유를 제약당하는 모순적 상황이 발생했다”면서 “이러한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하고 정치선진화를 이루기 위해 선관위 조치에 대해 헌소를 제기하기로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대해 정치권 일부에서는 “공무원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규정하고 있는 공직선거법과 대통령의 정치인으로서의 지위를 나타내고 있는 국가공무원법이 서로 상충되고 있는 것을 강하게 지적함으로써 대선에서의 발언권을 얻는다는 계획이 세워져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상충되는 법령 속에 갇혀 있느니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를 찾아 대선에서 한 목소리를 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청와대가 선관위의 결정을 넘어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을 제기함에 따라 노 대통령이 정치적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인지, 아닌지의 결정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때문에 헌법재판소의 법률적 최종 판단에 의해 노 대통령의 정치적 발언이 어떤 식으로 전개될 지에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