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 윤한봉(59) 민족미래연구소장의 빈소가 마련된 광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 조문행렬이 이어졌다. 5·18 관련단체 관계자와 시민 등은 헌화와 분향을 통해 고인의 넋을 기렸다. 뜨거웠던 80년 5월, 고인과 함께 했던 민주화 동지들도 빈소를 찾았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 고인과 같은 교도소의 옆 옥사에 갇혔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이날 저녁 9시쯤 빈소에 도착, “한국 민주화운동의 거목이 쓰러져 애석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윤 소장이 망명 중인 1988년, 그의 안전한 귀국을 위한 ‘윤한봉 선생 귀국추진위원회’에서 활동한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도 6월29일 빈소를 찾아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윤한봉 소장은 민주화운동을 하던 중 받은 고문과 도피 과정에서 얻은 지병이 악화되면서 숨을 거두게 됐다. 지인들에 따르면, 고 윤 소장은 고문 등의 휴유증으로 1994년부터 폐기종을 심하게 앓아왔으며, 지난 6월24일 영동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이식 수술을 받아 상태가 호전되기도 했으나 갑자기 의식을 잃고 사망에 이르게 됐다.
윤 소장의 장례는 그와 뜻을 함께 했던 선후배들과 5·18 관련단체 등이 장례위원회를 구성했다. 그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으로 6월30일 치러졌으며 유해는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됐다. 5월 정신 계승을 위해 앞장서던 윤 소장은 결국 5·18의 품에 안겨 잠든 것이다.

젊음, 민주화에 바친다
1948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난 윤한봉 소장은 대학생 시절부터 민주화운동을 주도했다. 그 시절 젊음의 혈기로 민주화의 길을 선택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처럼 열정적인 삶을 선택한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1974년 전남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윤 소장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 당시 전남북 지역 총책임자로 붙잡혀 15년 형을 선고받고 투옥됐다.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출소한 후에도 그는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다. 이후 1979년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수배를 받고 도피생활을 했으나 또다시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주동자로 지목돼 전국에 수배되자, 11개월 동안이나 도피생활을 했다. 당시 신군부는 전남지역 청년 운동권의 핵심이었던 윤 소장을 붙잡으려고 혈안이 돼 있었고, 그는 붙잡혀서 동지들의 이름을 부는 것보다 자살을 택하겠다며 비장한 각오로 몸에 흉기를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동지들과 전남도청을 사수하지 못하고 도망 다녔다는 멍에를 지니고 살았던 그는 1981년 4월29일 후배들의 권유로 4만 톤급 무역선에 몸을 실고, 35일간을 숨어 지내며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의 밀항은 당시 광주운동권에서는 ‘밀항신화’라 불렸을 정도로 많은 위험과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미국으로 몸을 옮겼다고 해서 그가 하는 일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머무는 12년 동안에도 그는 LA 근교에 민족학교를 세웠고, 미국·일본과 유럽에 재미한국청년연합을 결성,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면서 몸소 민주화운동을 실천해왔다.
또한 고국의 반독재투쟁을 지원하고, 분단국가의 실정과 통일의 당위성을 세계인에게 호소하면서, 가난과 인종차별로 고통 받는 소수민족의 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고 윤한봉 소장은 “난 홀로 살아남은 죄인”이라며 광주에서 살아남았다는 부채의식으로 미국생활 동안 철저한 금욕을 실천했다. 당시 윤 소장은 “미국 생활에 적응하지 않는다. 조국의 가난한 동포들과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지들을 생각해서 침대에서 자지 않는다. 도피 생활할 때처럼 허리띠를 풀고 자지 않는다”는 생활원칙을 세웠으며, 이를 끝까지 지켜냈다.
현실은 살아남은 자의 몫
고 윤한봉 소장은 1993년 5·18 관련 수배자 중 마지막으로 수배가 해제된 후 귀국했다. 한국을 떠난 지 꼭 12년만의 일이었다. 그리고 그는 귀국과 함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고스란히 가져왔다.
귀국 후 5·18기념재단 설립에 주도했는가 하면 들불야학, 열사기념사업 등 운동의 일선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는 들불열사 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민족미래연구소를 설립, 직접 소장에 취임했다.
살아남은 자는 먼저 간 이들의 몫까지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 윤한봉 소장은 민주화 투사로의 삶에 쉴 새 없이 채찍질을 가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던 것은 광주항쟁의 정신을 오늘의 현실에되살려내는 것이었다.
지난 2005년 어느 인터뷰에서 그는 “역사적으로나 사회 경제적으로나 광주는 진보의 온상이고 고향이다. 그런데 그 광주가 진보성을 잃고 있다. 광주는 이제 민주화의 성지가 아니라 망지다. 통탄할 일이다”고 광주의 현실을 질타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 기인했다.
그는 “5·18 행사가 시민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겉도는 측면이 많았다”며 광주항쟁의 박제화도 경계했지만 “시민들이 5·18 정신을 생활로 받아들일 때만 ‘5·18의 정치도구화’를 막을 수 있다”며 5·18을 정략적으로 이용하거나 상업화하려는 시도도 비판했다.
그는 5·18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5월을 이용하지 말라”고 거침없는 비판을 해왔다. 이 때문에 주위의 냉대를 받기도 했지만 그의 신념은 끝까지 꺾이지 않았다.
심지어 자신의 삶에 대해서도 ‘5·18’이라는 이름으로 그 어떤 명예나 보상도 원치 않았다. 윤 소장은 1994년 5·18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하고도 아무런 직책을 맡지 않았고 5·18 광주민중항쟁에서의 보상도 받지 않으려해 친형 광장소장이 서류를 직접 작성해 보상을 신청했다.
그는 마지막까지 ‘5월’에 살다 ‘5월’로 돌아갔다. 2004년 폐기종을 앓던 그는 하루 10시간 이상을 산소 발생기에 의존하면서도 윤상원, 박관현 등 들불야학 출신 열사 7명의 뜻을 기리는 ‘기념사업’을 주도했고, 인생의 마지막을 여기에다 바쳤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정치화·이권화를 반대하며 진정한 오월정신의 계승을 이어온 고 윤한봉 소장. 그는 자신의 모든 젊음과 열정과 생애를 송두리째 ‘5월 광주’의 재현에 던졌지만 ‘5월’을 내세운 그 어떤 명예나 보상을 거부한 채 꿋꿋하게 외길 인생을 살아왔다. 윤한봉이라는 이름 석자 위에 ‘5·18정신’을 순백으로 계승해온 인물이라는 평이 붙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