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찰, 판세 좌우
검찰이 대선에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한 시기는 1997년 대선부터이다. 15대 대선을 눈앞에 둔 1997년 10월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이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3백65개의 차명계좌로 6백70억원 대의 비자금을 관리해 왔다”고 비자금 의혹을 제기했다. 신한국당은 며칠 후 김대중 후보를 뇌물수수 등의 혐의로 고발했지만 김태정 검찰총장은 ‘형평성’과 ‘대선 전 수사종결 불가능’을 이유로 수사를 유보했다. 결국 이 의혹은 김대중 후보가 당선되면서 흐지부지 됐다.
또한 김대업씨가 이회창 신한국당 후보의 장남 정연씨와 차남 수연씨의 병역 비리의혹이 제기하기도 했다.
2002년 대선에는 검찰의 개입이 더 심해졌다. 2002년 5월 이후 김대업씨가 1997년에 이어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의 장남 정연씨의 병역 비리 의혹을 제기했다. 이른바 ‘병풍(兵風)’의 시작이었다.
또한 이교식 기양건설 전 상무가 폭로한 “이회창씨 부인 한인옥씨가 기양건설에서 10억원을 받았다”는 의혹과 민주당 설훈 의원이 폭로한 “이회창 후보가 최규선씨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는 의혹이 병풍과 더불어 3대 의혹으로 불리며 이 후보를 맹공격했다.
검찰은 의혹이 제기될 때마다 고소·고발을 통해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이회창 후보와 관련한 3대 의혹 중 검찰이 대선 전 밝혀낸 것은 김대업씨 병역 비리건 뿐이었다. 이 건과 관련해 검찰은 10월 중간수사발표를 통해 “김씨가 제기한 의혹은 근거가 없고, 병역비리 은폐대책회의가 열렸다는 증거도 없다”고 밝혔다.
다른 의혹에 대해서는 선거운동 기간 동안 수사가 진행되면서 이회창 후보의 지지율에 엄청난 손실을 줬다. 뿐만 아니라 수사 도중 나오는 사안들이 다시 이회창 후보의 숨통을 쥐었다. 허위 녹음테이프나 영업장부가 물증으로 제시됐고 아침저녁으로 정치권의 동태가 국민에게 전해지는 상황이라 검찰의 수사내용이 마치 사실인양 국민에게 전해진 것이다.
3대 의혹 중 병역비리건은 2003년 1월 검찰이 최종 수사발표를 통해 “이 후보 장남의 병역회피는 무혐의”라고 결론지었다. 이후 김씨는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 기소돼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다른 두 의혹도 ‘근거 없음’으로 판명 났고 의혹을 제기한 이들은 법의 심판대에 섰다. 하지만 이러한 검찰의 조사 결과가 나왔을 때는 이미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고배를 마신 뒤였다.
검찰, 명예회복 노려
수사가 지지부진해지며 대선결과를 뒤엎기도 했지만 검찰이 모든 사건을 ‘근거 없음’으로 결론지었던 것은 아니다. 1997년 국세청을 이용해 기업들로부터 불법 대선자금을 모았다는 ‘세풍(稅風)사건’은 2002년 대선 과정 이후까지 수사를 진행, 이회창 후보의 동생 회성씨와 서상목 전 의원이 유죄 판결을 받는 등 사실로 판명됐다.
하지만 이러한 공(功)은 1997년, 2002년 대선에서 검찰의 과(過)보다 작아 검찰은 ‘정치검찰’로 불리며 이미지를 실추했다. 때문에 검찰 내부에서는 이번 대선을 명예회복의 기회로 삼겠다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정상명 검찰총장이 2일 “선거 관련 사건에 신속하게,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지침을 내린 것도 대선 경선 이전 수사종결로 흑백을 가려 대외적으로 중립성도 인정받겠다는 의지가 반영됐다는 것이다.
법조계 출신 한 당직자는 “검찰이 이번 대선에서 장기말이 되지 않으려면 대선 전에 제기된 의혹을 명확하게 해결해야 할 것이다. 수사 기간이 늘어지게 된다면 2002년의 반복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고 충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