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여왕’ 박세리(30ㆍCJ)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제이미 파 오언스 코닝클래식에서 시즌 첫 승을 차지하며 화려한 부활을 알렸다. 박세리는 16일(한국시간) 오하이오주 실베이니아 하일랜드 메도스골프장(파71ㆍ6428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일 경기에서 4언더파 67타를 기록해 합계 17언더파 267타로 홀인원을 하며 쫓아온 모건 프레셀(14언더파 270타)을 꺾고 통산 24번째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골프 여왕’의 행차 앞에선 홀인원도 ‘깜짝쇼’에 불과했다. 이는 작년 6월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우승 이래 13개월 만에 오른 정상이다.
최근 들어 가장 멋진 스포츠 뉴스 중 하나는 박세리의 우승일 것이다. 1998년 미국 여자프로골프 투어(LPGA)에 진출하자마자 잇따라 메이저 대회 우승을 차지, 단숨에 강자로 떠올랐던 박세리는 장기간 슬럼프를 겪다 13개월 만에 이번 제이미 파 오웬스 코닝 클래식대회에서 우승했다. 세계무대를 선구적으로 개척해 한국여자프로골프의 맏언니 자리에 오른 박세리는 우리나라에 골프 붐을 일으켰고 골프를 인기 스포츠로 밀어 올렸다. 박세리의 뒤를 이어 많은 후배들이 LPGA 무대에 진출했고 우승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박세리의 부진이 이어지자 LPGA에 대한 인기는 예전만 하지 못했다. 다른 선수들의 우승은 박세리의 우승만큼 감동과 흥미를 유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돌아온 골프 여왕’ 박세리

박세리의 이번 우승은 6월 맥도널드 LPGA 챔피언십 이후 13개월 만에 정상에 오른 것과 함께 23년 전통의 대회 사상 최초로 나흘 내내 선두자리를 단 한 차례도 빼앗기지 않은 ‘와이어 투 와이어’ 우승이라는 점에서 더욱 감동적이다.
이로써 LPGA투어에서만 개인 통산 24승을 거두게 된 박세리는 1998년, 1999년, 2001년, 2003년 우승을 보태 이 대회에서만 5개의 우승 트로피를 수집함으로써 시 아일랜드오픈의 미키 라이트(미국), 미즈노클래식과 삼성월드챔피언십의 안니카 소렌스탐(스웨덴)에 이어 LPGA투어 사상 단일 대회 최다승(5승)을 거둔 세 번째 선수로 남게 됐다.
이번 우승으로 전성기 때의 기량에 거의 근접했음을 여실히 입증했다는 것도 큰 수확이다.
2타차 단독 선두로 나선 마지막 라운드의 전반 9홀에서는 프레셀이 박세리를 압도했다. 박세리가 4번홀과 5번홀(이상 파4)에서 연속보기를 범한 반면 프레셀이 2번홀(파3)과 4번홀(파4)에서 버디를 잡아 오히려 입장이 바뀐 상태가 됐다. 5번홀에서 프레셀이 1타를 잃어 다소 주춤하는 듯했지만 6번홀(파3)에서 7번 아이언으로 친 티샷이 그대로 홀로 빨려 들어가 기세가 등등했다.
상대의 홀인원을 축하해 준 박세리도 이에 뒤질세라 같은 홀에서 7.5m가량의 버디 퍼트를 떨궈 타수차를 2타차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기싸움에서 결코 밀리지 않은 박세리는 8번홀(파3)에서 60㎝ 버디를 잡은 뒤 9번홀(파4)에서 또다시 2.5m가량의 버디 퍼트를 성공시켜 기어이 동타를 이뤄 냈다.
이후 두 선수의 매치 플레이를 방불케 하는 접전은 다섯홀 파세이브로 다소 소강 국면을 맞는 듯했다. 대회 최대 승부처가 된 것은 15번홀(파4). 3번 우드로 티샷을 날린 박세리는 154야드를 남겨 놓고 7번 아이언으로 친 두 번째 샷을 핀 90㎝에 붙여 버디를 잡아 1타차 리드를 잡기 시작했다.
17번홀(파5)에서도 나란히 버디를 잡은 둘의 희비가 교차된 것은 마지막 18번홀(파5). 티샷이 숲으로 들어가 위기를 맞은 프레셀이 레이업 한 뒤 드라이버로 세 번째 샷을 날렸으나 그린에 미치지 못해 보기를 범한 사이 박세리는 85야드를 남겨 놓고 샌드웨지로 날린 세 번째 샷이 그대로 홀로 빨려들 듯하다가 지나쳐 30㎝에 붙어 탭인 버디를 잡으면서 대단원의 막은 내렸다
마음의 여유로 원숙미 찾아
서른 살 원숙해진 박세리는 이제 스윙 머신이 아니다. 무덤 옆에서 밤새 스윙 연습을 하고, 하체 강화를 위해 하루 종일 아파트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했던 불굴의 소녀가 아니다. 두 번째 전성기를 맞는 박세리는 “가장 달라진 것은 여유”라고 말한다. “샷을 할 때는 집중하지만 스트레스를 덜 받으니 경기도 잘 된다”고 했다. 이번 우승도 마찬가지였다.
최종라운드를 2타 차 선두로 출발한 박세리는 경기 초반 역전을 당했다. 특히 6번 홀에서 추격하는 모건 프리셀에게 홀인원을 맞으면서 참패하는 분위기였다. 홀인원은 상대선수의 기를 쏙~ 빼놓는 좌절감 그 자체다. 그러나 박세리는 주저앉지 않았다. 되레 “상대방의 홀인원이 경쟁심을 더 자극시켰다”고 전했다. 박세리는 이 홀에서 버디로 응수했고, 8번 홀과 9번 홀에서 다시 버디 퍼트를 하며 공동 선두에 복귀했다. 15번 홀 버디에 이어 17, 18번 홀에서 연속 버디를 잡아 승부에 쐐기를 박았다. 11살 아래 ‘신동’ 모건 프레셀(미국)의 홀인원도 ‘여왕의 귀환’을 막지는 못한 것이다.
박세리 2년간 슬럼프, 결국 ‘극복’

2004년 5월 미켈럽울트라오픈에서 통산 23승을 거둔 뒤 이유를 알 수 없는 부진의 늪에 빠져 헤맨 시간이 2년이 넘는다. ‘골프 여왕’이 일부 네트즌들에 의해 ‘주말 골퍼’보다 못한 수준으로 전락했다는 참담한 비난과 출처가 불분명한 온갖 루머들 속에서 박세리의 자존심은 상처받고 짓이겨져 회복 불능의 상태에까지 이르렀다.
모든 게 엉망이었다. 좌우로 마구 흩어지는 그의 샷을 두고 “난초를 그렸다”는 말까지 생겨났다. 시즌 상금 랭킹과 평균 타수도 곤두박질쳤다. 아플 만큼 아파봤고 울 만큼 울어봤고 할 만큼 해봤다는 지독한 슬럼프의 시간들. 당시 박세리는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았다고 전했다. 매사에 자신이 없어지고 재미도 없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전화 통화조차도 귀찮아 졌다. 우울증 초기 증세가 아닐까 싶을 정도의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골프채를 놓고 아예 놀기만 하자는 생각도 해봤지만 안타깝게도 골프는 배웠지만 노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박세리는 강했다. 13개월 전인 지난해 맥도널드LPGA챔피언십 우승으로 부활을 예고한 이후 자신감을 되찾는 데 필요한 건 죽기 살기식 훈련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이렇게 2004년과 2005년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던 박세리는 2006년 6월, 8년 전 자신을 처음으로 미국 대회 정상에 오르게 했던 맥도널드 LPGA챔피언십에서 극적인 역전 우승을 올리며 새롭게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지만 이후 한동안 우승과 인연을 맺지 못했었다.
하지만 지난 2일 끝난 US여자오픈에서 공동으로 4위에 오르는 등 올해 '톱10'에 5차례나 입상하면서 서서히 정상궤도에 접어들던 박세리는 이번 제이미 파 오웬스 코닝클래식 우승으로 전성기 때의 위용을 되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