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당시 국정교과서 주식회사에서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 빛을 내는 사람과 바라만 봐도 눈이 부신 사람. 머리숱이 적어 기죽은 사람과 이를 놀림감으로 여긴 사람. 기가 죽은 사람들은 급기야 ‘독도회’라는 한국 최초 대머리 친목회를 창립했다. 과연 가발을 자신 있게 벗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우려와는 달리 회원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전국에서 문을 두드리는 초절정 인기단체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이들 조직은 넘쳐나는 회원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회원자격까지 마련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벗겨진 머리 면적에 따라 정회원과 준회원을 구별했던 것. 당시 사건을 재구성했다.
사람들은 자꾸만 넓어지는 그의 머리를 보고 “오늘은 유난히 인물이 훤하다”는 등의 우스갯소리를 자주 하곤 했다.
그래서 일까. 회사 상사의 높은 언성에도 그는 자신을 비아냥대는 것처럼 느끼며 민감하게 받아들였다. 빠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도 강한 집착을 보이던 빛나리는 몇 달전 개최된 사내 체육대회를 떠올리며 분개했다.
그 날 가발만 벗겨지지 않았어도 자신이 대머리라는 사실을 아무도 몰랐을 텐데 빛나리의 안타까움은 날로 배가 되는 듯 했다.
“자부심 되찾자” 의기투합
1980년대 당시만 해도 ‘대머리’는 감춰야 할 비밀인 마냥 주변 사람이 알려질까 “쉬쉬”해왔다. 일종의 ‘치부’였던 셈. 빛나리도 자신이 대머리란 사실을 숨긴 채 가발을 쓰고 회사를 다녔다.
굳이 대머리라고 알릴 필요도 없었지만 유난히 자신의 머리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도 그가 대머리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그때. 체육대회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체육대회의 승리를 위해 바람을 가르고 달렸건만 잠시 방심한 사이 벗겨지지 말아야 할 것이 벗겨져버렸던 것. 그가 애지중지하던 숱 많은 가발이 그만 바람에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폭소의 장이 되면서 어쩔 줄 몰라하는 빛나리. 이날 빛나리처럼 가발이 벗겨진 다른 동료 직원도 여럿이었다. 이들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눴다.
그날이 있은 후 동료 직원들은 대머리인 이들을 재미삼아 농담을 던지기 시작했다. 회사 출근만큼 이들에게 악몽은 더 없었다. 참다 못 한 빛나리가 말했다.
“남들보다 머리숱이 적은 게 범죄행위도 아닌데 굳이 숨길 필요가 있는가.”
신세한탄은 끊이질 않았다.
“남들보다 이마가 좀 넓은 게 어때서 우리가 그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가.”
빛나리 외 다른 대머리들은 “우리의 자부심을 되찾자”라는 목적 아래 의기투합하여 그날부터 대머리들에 대한 연구에 몰입했다.
그 결과 세계적인 명성을 떨쳤던 인물들 가운데에는 대머리가 많았다는 사실을 찾아낸 이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대머리들의 모임이 세계적으로 활성화됐다는 사실에 이들의 마음은 어린아이마냥 벅차오르기까지 했다.
미국에는 지난 1974년부터 조직화된 대머리 모임이 있었고, 가까운 나라 일본에서도 ‘광두회’라는 모임이 있었다.
빛나리는 주먹을 불끈 쥐며 “우리도 대머리들의 모임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대머리들도 동의했다.
이렇게 해서 한국에서도 대머리들의 모임이 최초로 생기기 시작했다. 그 이름도 찬란한 독두회. 반짝이는 머리 하나로 어둔 세상을 밝히겠다는 거창한 염원을 담았다. 그리고 이들은 “당당히 뚜껑을 벗자”며 신문에 회원 모집 공고를 대대적으로 냈다.
과연 사람들이 지금까지 숨겨왔던 대머리라는 사실을 밝힐 수 있을까. 회원 모집에 우려가 있었지만 이 고민은 하루뿐이었다. 신문에 공고가 나간 뒤 신문을 본 많은 대머리들이 회원으로 가입하고 싶다며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던 것이다.
가입자 대만원 ‘인기 초절정’
모집 당일 대만원을 이루게 되자 ‘독도회’는 급기야 엄격한 심사를 해야만 했다. 벗겨진 머리의 면적이 가로 13cm, 세로 12cm를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독두회’에서 정식 회원으로 활동할 수 없었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이 ‘독도회’는 초절정 인기단체로 거듭나면서 언론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대머리들은 독도회로 하여금 움추렸던 어깨를 펼 수 있었다고. 현재까지도 ‘독도회’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얘기도 전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