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을 맞이하여, 여러 종류의 '급조' 그리스 관련 서적들, 다시 말해 '그리스를 알자!' 류의 졸속 편집서적들이 줄짓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 와중에서도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는 그리스 아테네 올림픽 '덕택에' 만나볼 수 있는 흥미로운 서적으로 반드시 추천하고픈 책이다.
<호메로스의 세계>는 우리가 호메로스의 명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읽으며 늘상 궁금했던 부분들을 마치 '가려운 곳을 긁듯' 시원하게 풀어헤쳐 보이고 있다. 먼저, '호메로스'라는 인물은 과연 실존했던 인물이 맞는가? '트로이 전쟁'이란 실제로 존재했던 전쟁이 맞으며, 각 서사시는 정확히 어떤 시대를 가리키고 있는 것인가? 이 두 서사시 속에 존재하는 '신'은 과연 어떤 위치의 인물로 보아야만 하는가?
얼핏 선정적인 주장들로 그득찬 서적으로 오인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저자이자 세계적인 역사학자로 잘 알려진 피에르 비달나케의 간명하면서도 지적인 깊이를 고스란히 보유하고 있는 필치를 통해 펼쳐진 '분석'과 '해석', 그리고 '해체'의 글쓰기는 독자들의 지적호기심을 극단적으로 자극하면서도 그 무게감을 떨어뜨리지 않는 '대중적 교양서'의 최극점을 명쾌히 짚어주고 있다.
먼저, 이 책의 저자 피에르 비달나케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하자. 1930년생인 비달나케는 현재 파리 고등 사회과학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세계적 권위의 고대 그리스 연구가이다. 그는 또 당대의 인권 문제에도 큰 관심을 지니고 있는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프랑스가 알제리 민족해방전선과 전쟁을 벌일 시, '121인의 선언'에 참여하여 전쟁반대를 선포한 인물이기도 하다. <오댕사건>('58)이라는 책을 통해 알제리에서 행한 프랑스군의 고문을 고발하기도 했던 그는, <고대 그리스의 경제와 사회>('72), <검은 사냥꾼: 그리스 세계의 사고 형식과 사회 형태>('81), <다른 곳에서 본 그리스 민주주의>('90), <고대 그리스>(전 3권, '90∼'92) 등의 연이은 그리스 관련 서적을 발표하여, 현대 그리스 문명 연구가들 중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인물이다.
이 '엄청난' 그리스 귄위자가 펼쳐보이는 '의견', 즉, 과연 '호메로스'란 어떤 인물이며,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저자로서 그를 받아들이는 일이 합당한 지에 대해 비달나케가 주장하는 의견을 살펴보자. 우리가 알고 있는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는 기원전 5세기부터 시작된 그리스어 원전의 카피본이며, '호메로스'라는 이름이 언급된 것은 기원전 4세기, 플라톤에 의해서임이 입증되어 있는 상황이다. 과연 이런 '실팍한' 증거들만을 가지고 이 두 작품의 원작자로 호메로스를 거론하는 일이 과연 합당한 것일까? 비달나케에 의하면, '호메로스'라는 인물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는 이 두 서사시를 완성시키는 데 일조했던 여러 음영시인들 중 한 인물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는 또, 이 두 서사시의 텍스트가 기원전 900년경, 페니키아의 그리스인들에게서 빌려온 알파벳 서법을 통해 정착되었으리라 주장하고 있으며,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공식판을 내기로 결정한 기원전 560년경에 씌여졌다고도 예상하고 있다. 이 두 서사시가 '책'의 형태로 처음 인쇄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 1488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서사시가 거의 변화없이 그대로 옮겨졌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기적적인 일이다.
비달나케는 이 밖에도, <일리아스>에서 여러 종류의 보상금이 청동으로 치러지며, 토지나 경작지가 그닥 큰 가치를 지니고 있지 못한 '소유물'임을 밝혀내어 각 서사시 간의 시대상의 격차를 짚어보이고 있으며, '트로이 전쟁'시, 트로이가 절대 미개민족이 아니었음을, 그리고 이들은 아카이아인들과 신을 공유하기까지 했음을 입증하여 시대사회적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얼마 전 공개되어 큰 인기를 누린 영화 <트로이>를 통해 '트로이 전쟁'에 새롭게 관심을 갖게 된 대중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새 정보'를 알려준다는 의미로서도 한번쯤 지목해 볼만한 부분일 듯.
<호메로스의 세계>는 이 밖에도, '남자와 여자, 늙은이와 젊은이', '시의 세계', '역사와 지리' 등의 흥미로운 챕터를 통해 각각의 시대상과 문화/사회를 짚어보이고 있으며, 부록으로 실린 '<일리아스>, <오디세이아> 줄거리', '트로이왕 계보', '지중해 주변도' 등도 그리스 문명에 관심많은 이들에게 더없는 '보충자료'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고, 흥겨운, 더운 여름밤을 시원하게 보내게 해 줄 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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