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엔 지금 M&A(인수합병) 광풍이 불고 있다.” 최근 만난 재계 고위 관계자가 재계동향을 요약한 말이다.대기업도, 중견기업도, 너도나도 M&A에 기업경영의 사활을 걸고 있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재계 대부분 기업이 신성장 동력원 찾기에 분주한 상황이고 보면 가장 빠른 길은 M&A로 모아 질 수밖에 없다. 불투명한 신사업에 무리하게 뛰어들기보다는 M&A에 따른 생존 돌파구가 안전하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이라는 얘기다.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해외기업에 대한 M&A보다 국내 기업의 M&A에만 치중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다. 또 외형에 치중한 잘 못된 농사로 오랜 시절 쌓아 온 경영노하우를 한순간에 망칠 수 있다는 부정적인 시각도 나온다.
M&A는 이제 기업들의 경영기법 중 하나로 확실히 자리한 모습이다. 기업이 외형확대를 꾀하던, 새로운 사업방향을 모색하던, M&A 대상 기업의 노하우를 통째로 흡수하는 득이 많은 경영기법인 셈이다.
때문인지, 최근 몇 년 사이 적지 않은 기업들이 M&A에 공을 들이고 있다. 재계 판도가 M&A로 하루아침에 바뀔 정도다. 국내 기업 경영 상황이 짧게는 5년, 길게는 20~30년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깔려 있다.
불투명한 신사업 진출로 무리수를 두느니 M&A를 통해 몸집도 불리고, 새로운 기업으로 탈바꿈하려는 복안이다. 한마디로 생존 돌파구가 곧 M&A 성공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두산·금호 ‘거침없는 질주’
그렇다면 어떤 기업들이 M&A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을까.
단연 눈에 띄는 곳은 두산그룹이다. 인수합병을 통해 기업 체질 자체를 송두리째 바꿨기 때문이다. 두산그룹은 원래 식품 등의 전통적 내수 소비재 중심의 사업을 하던 곳이었지만 지속적인 인수합병을 통해 현재는 완전한 중공업 중심으로 경영 자체를 탈바꿈 시켰다. 두산그룹은 수년에 걸쳐서 옛 한국중공업(두산중공업), 옛 고려산업개발(두산산업개발), 옛 대우종합기계(두산인프라코어) 등을 인수한 바 있다.
두산그룹은 M&A 시장에서 성공모델로의 입지도 완전히 굳혔다. 지나친 M&A로 몸집 불리기에만 열을 올리다 시장에서 퇴출됐던 여러 다른 기업들과는 방향성부터 달랐다는 얘기다. M&A 시장에 뛰어들 때부터 확실한 방향성을 잡고 움직였다는 방증이다.
최근만 하더라도 두산그룹은 미국의 대표적인 중장비 업체 ‘잉거솔랜드’ 3개 사업부문을 인수했다. 두산그룹에 따르면 지난달 30일 미국 잉거솔랜드의 소형 건설중장비 등 3개 사업부문을 49억달러(약 4조5천억원)에 인수계약 했다. 이는 국내 기업이 해외에서 추진한 M&A 중 사상 최대 규모다.
이 같은 M&A로 두산그룹은 글로벌 행보에 날개를 달게 됐다. 잉거솔랜드가 운송, 건설, 농업 분야의 각종 기계설비 및 서비스를 제공하는 세계 1위의 소형 건설중장비 업체이기 때문이다.
두산그룹 관계자는 “두산인프라코어가 인수할 사업 부문은 건설중장비를 비롯, 부착 장비, 건설용 발전·조명 등이다”라면서 “기존 중대형 건설중장비 사업 부문에 이번 인수로 소형 부문까지 완전한 틀이 갖춰졌다. 첨단기술력과 브랜드를 바탕으로 세계적인 중공업 업체로 도약했다”고 자평했다.
M&A 시장에서는 그동안 두산그룹이 식품 등의 사업 부문에 대한 지속적인 매각을 진행했던 만큼 충분한 실탄 확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 있을 대우조선해양이나 현대건설 등의 국내 초대형 매물 인수전에도 의욕적인 행보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지난해 M&A 시장에서 가장 큰 화두를 몰고 다녔던 금호·아시아나그룹도 빼놓을 수 없다. 대우건설 인수를 통해 재계 판도의 변화를 몰고 왔고, 지난해부터 “M&A로 재도약 하겠다”는 그룹 내부 비전을 수립한 상태여서 더욱 그렇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최근에도 여전한 M&A의 의지를 보인다는 평가다. 또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우건설 빌딩 매각 등으로 충분한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만큼 그동안 관심을 표명한 대한통운 등의 대형 매물에 적극적으로 뛰어들 것이란 분석도 뒤따른다.
재계 한 관계자는 “초대형 매물들이 어림잡아 60조원 규모로 줄줄이 대기 중인 상황이어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M&A 매물 인수전에서 어떤 움직임을 보일지 주목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롯데그룹, GS그룹, CJ그룹 등도 그동안 지속적으로 M&A에 나섰던 만큼 언제, 어떤 매물 인수전에 뛰어들지 관심이 모아진다. 특히 GS그룹은 물류부문 강화를 발판으로 2010년까지 재계 5위권 진입을 노리고 있어 대한통운 인수전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 등과 한판 혈전을 벌일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모 대기업 한 관계자는 “최근의 M&A 시장을 놓고 볼 때 IMF 위환위기 직후 단행됐던 ‘빅딜’과 버금가는 규모의 ‘재계발(發) 빅뱅’이 가시화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재계 판도의 지각변동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중견들 M&A 통해 급성장
중견기업들이 재계서열 상위에 이름을 올리는 가장 빠른 비결은 M&A이다. 이런 맥락에서 재계가 주목하고 있는 곳은 STX그룹과 C&그룹, 유진그룹 등이다. 이들 이름 앞에 ‘M&A 신흥 강자’란 별칭이 따라 붙는 것을 보면 활약(?)을 짐작할 만 하다.
STX그룹은 불과 그룹 출범 6년만에 재계 순위 24위로 껑충 뛰어 올랐다. STX그룹은 옛 쌍용중공업(STX), 옛 대동조선(STX조선), 옛 산업단지관리공단(STX에너지), 옛 범양상선(STX팬오션) 등 부실 기업들을 차례로 인수한 뒤 그룹성장을 이끌었다. 자산규모만 6조원에 이른다.
C&그룹도 급성장의 견인을 M&A에 맞췄었다. 옛 세양선박(C&상선), 우방건설(C&우방), 아남건설(C&우방ENC) 등을 잇따라 인수하면서 매출 1조8천억원 규모의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재계 일각에선 C&그룹의 무리한 M&A에 대한 우려를 높였고, 실제 C&그룹 역시 최근 일부 계열사를 다시 매각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주목을 한몸에 받고 있는 곳은 유진그룹이다. 최근의 M&A 시장에서 거침없는 질주를 이어가고 있다. 유진그룹은 고려시멘트, 서울증권, 로젠 등의 인수를 통해 자산을 1조5천억여원 규모로 키웠고, 최근엔 로또복권 2기 사업자 입찰에서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영토확장의 전성기를 맞고 있다.
한편 재계에선 과도한 몸집불리기에 따른 ‘자멸’의 우려도 나온다. 특히 정상적인 M&A 형태라고 보기 어려운 복마전 양상이 전개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높다. 재계 관계자는 “비정상적인 가격 등 외형확대에만 치중하다보면 몸집은 커지겠지만 속으로 곪아터질 수밖에 없다”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