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선 중간을 넘기면서 여론지지도에서도 조순형 후보를 앞지르는 기염을 토하며 ‘조순형 대세론’을 ‘이인제 대세론’으로 바꿔놨다. 조순형 후보는 이 후보의 동원선거 의혹을 제기했지만 당 지도부가 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후보를 사퇴했다.
하지만 조 후보는 이 후보의 부정선거에 대한 법적 대응을 취해 논란의 불씨가 여전하다. 다른 후보들도 조 후보의 사퇴에 대해 이 후보에게 책임을 묻고 있고 경선 불복 가능성마저 내비치고 있다는 점은 이 후보가 넘어야 할 산이다.
이인제 후보가 민주당에서 깃발을 높이 들었다. “중도개혁주의의 깃발을 들고 연말 대선에서 한나라당을 눌러 이기는 선봉에 서고 싶다”며 대선출마를 선언한지 3개월만의 일이다.
민주당, 이인제표 깃발로?

정치권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철새 정치인’이라는 낙인은 그가 가는 곳 어디에서나 붙어 다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 후보가 가는 길마다 ‘경선불복’이라는 단어가 심심찮게 들려온다”며 “정치의 계절이 돌아오니 대권병을 버리지 못하고 또 나선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후 이 후보가 민주당에서 다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조순형 후보가 대권선언을 하며 위기가 찾아왔다. 조 후보는 대선출마 선언 직후 범여권 후보 지지도 3위로 껑충 뛰어오르며 이 후보와의 거리를 한층 벌린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이 후보의 측근으로 활약한 이는 “지지율의 차이보다는 든든한 후원자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더 클 것”이라며 조 후보의 대선출마 선언 이후 한동안 말을 잃은 이 후보의 심경을 짚기도 했다.
여론지지율이나 이미지에서도 조 후보가 단연 앞서갔다. 이 후보는 조 후보의 대세론을 이길 승부수로 ‘조직’을 택했다. 조 후보가 여의도에 머무르는 동안 전국을 돌며 조직 다지기에 나섰다. 2번의 대선이 그에게 준 인생의 경험도 ‘버스투어’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었다.
쓴소리-DJ 대립이 호재
이인제 후보가 민주당 경선에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은 조직적 우위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조 후보와의 접전이 이 후보를 살렸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이 범여권 대통합과 관련 잇따른 훈수정치로 민주당의 갈등상황을 전개했을 때 조 후보의 반대편에 서서 DJ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 DJ와 끊어질 수 없는 민주당의 상황에 더 잘 어울렸다는 것.
조 후보는 이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앞으로는 정치적 중립을 지키고 현실정치에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그분(DJ)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위치를 지키고 우리는 우리대로 정치인 스스로 해 나가야 한다. (DJ가) 정치참여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 확고한 입장”이라고 분명한 목소리로 ‘쓴소리’를 이어갔다.
반면 이 후보는 DJ와의 반목은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 후보는 “DJ와 갈등을 키워나가는 것은 한나라당을 이롭게 하는 것 아니냐. 한나라당과 한나라당을 지원하는 언론들의 노림수에 빠져서는 안된다”면서 “이 갈등을 자꾸 키우는 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고 특히 민주당의 힘이 빠지는 일”이라고 못박았다.
이는 호남을 지역기반으로 하는 민주당이 호남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DJ와 대립양상을 지속할 경우 대선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점을 꼬집은 것.
DJ를 둘러싼 두 후보의 갈등은 이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하지만 정치권 일각에서는 대립각을 세운 두 후보의 태도가 DJ의 심경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고 경선 중 적잖은 파장이 일 것으로 내다봤다.
그리고 민주당의 후보경선에서 여론조사 1위를 달렸던 조순형 후보가 전격 경선을 포기하자 “역시나”를 외치며 ‘DJ 개입설’을 들고 나왔다. 이는 곧 조 후보가 사퇴를 하며 외부세력 개입을 주장했던 것과 맞물렸다.

줄곧 대통합민주신당과 불편한 관계를 보이며 독자후보로 대선까지 가겠다고 주장해 온 조 후보의 의견이, 범여권 대통합을 통한 후보단일화를 주장해 온 DJ의 계획과 상충했다는 것도 조 후보에게는 악재로, 이 후보에게는 호재로 작용했다.
당내경선 불복 움직임 ‘꿈틀’
조직적 우위와 여론지지도까지 얻으며 당 경선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한 이인제 후보. 하지만 이 후보가 당을 장악하는 데는 여러 난제가 남아있다.
조 후보의 경선 사퇴 이후 다른 후보들은 일제히 이 후보에게 조 후보 사퇴의 책임을 물었다. “국민은 이 후보가 대선 삼수를 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탈당, 경선불복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지켜보고 있다”며 이 후보가 민주당이 내세울 ‘깨끗한’ ‘정통파’ 후보가 아니라는 점을 꼬집고 있는 것.
일각에서는 ‘반 이인제 연대’를 통해 후보들이 뭉치게 될 경우 경선불복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조 후보가 사퇴를 결심하기까지 당 지도부가 경선에서 불거진 부정선거 의혹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는 점도 경선불복 가능성을 짙게 하는 요소다.
조순형 후보측이 “캠프 차원에서 법률적 검토를 끝내고 선대본부 관계자들과 함께 논의를 한 뒤 검찰에 수사를 의뢰할 예정”이라며 “법적 대응을 통해 시시비비를 가려보는 게 좋겠다는 입장”을 보였다는 점도 이 후보의 앞날을 어둡게 하고 있다. 당 내·외에서 존경받는 인사가 그에게 칼을 빼들었다는 것은 그가 ‘불완전한 후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금권선거 의혹은 아무런 증거가 없고 불법선거도 없었던 것 같다. 불공정한 경선이 이뤄졌다고 보지 않는다”고 말한 이 후보의 말과 달리 조 후보측이 고발한 서울 강서지역 4천7백명 선거인단 명의도용, 전주시 완산을 지역 당원야유회 향응 제공, 특정 사단법인 경선동원 의혹 등 불법선거 사례 중 일부라도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후보단일화로 향하는 李
파행의 불씨를 안고 이 후보가 향할 곳은 범여권 후보단일화 논의의 장이다. 이미 범여권 일부에서는 후보단일화 방법에 대한 주장들이 제기되고 있다. 50%대의 굳건한 지지율로 ‘대세론’을 이어가고 있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를 이기기 위해서는 범여권 단일후보로 승부를 보는 방법 외에 다른 수는 없다는 절박함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밝지 않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의 범여 후보단일화 가상대결에서 이 후보는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와 독자세력으로 나선 문국현 후보와의 승부에서 15.0%의 지지율로 3위를 차지한 것.
이인제 후보는 “모순이 폭발된 신당은 국민의 지지를 받을 그릇이 못 된다”며 “민주당 중심으로 후보가 단일화 될 것”이라고 주장하며 한단계 더 큰 도약을 위해 신발끈을 고쳐 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