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곳에 가면 차마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찬란한 은빛 으악새가 가을바람을 물고 '어서 와, 어서 와'하며 안타까운 손짓을 하고 있다. 그해 시월, 유난히 가을바람이 거세게 불던 그날, 우물 속처럼 깊숙한 눈동자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하얀 손수건으로 콕콕 찍어내며 은빛 으악새 사이로 떠난 그 누군가처럼.
지금 그곳에 가면 눈 시리도록 파란 가을하늘이 뭉게구름 몇 개 물고 오래 묵은 기억의 한 장면을 또르르 펼친다. 하늘하늘 은빛 요정처럼 춤을 추는 샛대 한 짐 지고 허위적 허위적 비탈진 산길을 내려오는 아버지의 그 굵은 땀방울…. 홍시 가득 담은 소쿠리 머리에 이고 행여 끼니 늦을 새라 바삐 걸어오는 어머니의 그 숨가쁜 모습….
그곳에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작은 불꽃이 인다. 으악새가 몸에 치렁치렁 두른 은빛 비단에도, 허리춤과 어깨 곳곳에 뾰쪽뾰쪽 솟아난 기묘한 바위에도 성냥불 같은 불꽃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 작은 불꽃은 병신춤을 삐쭉삐쭉 추며 일어나 이내 산등성이 곳곳을 피처럼 붉은 가을 놀 속에 훌쩍 내던진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할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하였기 때문에
나의 마음은 바람부는 저녁숲이었으나
이제 나는 은은한 억새 하나로 있을 수 있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때의 내 마음은
눈부시지 않은 갈꽃 한 송이를
편안히 바라볼 때와 같습니다.
당신을 사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끝없이 무너지는 어둠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조용히 다시 만나게 될
아침을 생각하며 저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을 사랑하는 내 마음은
가을 햇살을 사랑하는 잔잔한 넉넉함입니다.
가을햇살이 언뜻언뜻 비치는 시월의 둘째 주 토요일 오후 1시, 시인 도종환의 '가을사랑'이란 시를 나직이 읊조리며 억새의 고장 창녕 화왕산(757m)으로 간다. 근데 하필이면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창녕에 도착하자마자 는개가 내리기 시작한다. 평소 기암괴석이 멋들어져 보이던 화왕산은 발치만 약간 드러내고 있다.
노을처럼 아름답게 물들고 있는 단풍을 바라보며 오랜만에 화왕산의 깊어가는 가을 속에 포옥 잠기려 했던 나의 꿈은 애꿎은 는개가 순식간에 빼앗아가 버렸다. 하지만 '화왕산 갈대제'가 열리는 첫날이어서 그런지 는개가 내리는데도 정상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막걸리 한 병에 얼마죠?"
"작은 거는 3천원이고예, 큰 병은 5천원입니더. 고마 큰 병을 드이소. 그기 작은 거 두 개보다 양이 더 많심니더."
"그 참, 아무리 관광지라 해도 너무 비싸게 받는 게 아닌가요? 시중에서 작은 병은 천 원이고 큰 병이라고 해봤자 1500원인데."
"고마 앉으이소. 천원 깎아 드리께예."
화왕산 매표소 주변 포장마차에 앉아 막걸리로 목을 축인 우리 일행은 몸을 다시 한번 추스른 뒤 곧장 자하계곡을 따라 화왕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입구에서부터 차량을 통제하고
황토길을 다져놓았더라면 훨씬 더 좋았을 것을. 콘크리트길을 힘겹게 올라가는 도중에도 자동차들의 빵빵거리는 소리가 신경을 툭툭 건드린다.
근데, 누가 저 아름다운 자하계곡을 저리 무식하게 망쳐놓았단 말인가. 화왕산 정상으로 오르는 산길 옆을 휘돌아 나가는 자하계곡 곳곳에는 누군가 억지로 소(沼)를 만들기 위해 커다란 돌덩어리들을 제멋대로 옮겨 놓았다. 인공소에 담긴 물도 먹구름처럼 희끄무레한 게 천천히 썩어가고 있는 듯하다.
"아니, 그대로 두면 훨씬 더 보기 좋은 것을, 왜 비싼 돈을 들여 저리도 망치고 있는지 정말 모를 일이네."
"자연을 가꾸려면 자연의 섭리에 맞게 가꾸어야지. 바로 저런 거 때문에 계곡에 사는 물고기가 회유를 하지 못해 자꾸만 멸종하게 되는 거지요."
자하문을 지나 비지땀을 뻘뻘 흘리며 30분 정도 더 오르자 자하계곡 건너편에 도성암이라는 조그만 암자 하나가 화왕산의 지킴이처럼 웅크리고 있다. 는개가 천천히 도성암을 휘감는 모습, 그 모습은 마치 화왕산이 도성암을 향해 입김을 호호 부는 것만 같다. 는개에 젖어 파르르 떨고 있는 도성암의 손발을 녹여주기라도 하듯이.
사실, 화왕산의 산행은 이곳 도성암 입구에서부터 시작된다. 사람 두어 명이 비켜설 수 있는 비좁은 산길 곳곳에는 는개에 젖은 바위들이 울퉁불퉁 솟아나 있다. 미끄럽다. 게다가 는개가 산봉우리와 자하계곡을 온통 가리고 있어서 그런지 가쁜 숨이 더 가쁘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한다.
는개에 젖은 나뭇가지에 슬쩍 닿기만 해도 동그란 물방울이 투두둑 떨어진다. 왼 손에 든 작은 디지털카메라도 귀찮기만 하다. 숨을 헐떡거리며 30분 정도 더 오르자 는개가 서서히 걷히면서 자하계곡이 그 숨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디카에 담을 정도로 곱게 물든 단풍은 몇 보이지 않는다.
갑자기 길이 가팔라진다. 정상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그래. 이곳이 바로 화왕산을 오르는 등산객들을 환장하게 만든다는 그 '환장고개'가 아닌가. 그래. 정말 가도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통나무로 차곡차곡 쌓은 계단길 오른 편에 밧줄을 묶어놓아 정말 환장할 뻔했던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준다.
"서문까지는 아직 멀었나요?"
"5분만 더 올라가면 되예."
"아까도 어떤 분이 5분이라 했는데, 정말 환장하겠네."
는개와 땀에 옷이 축축해질 무렵 갑자기 앞이 확 트인다. 휴우. 저게 바로 화왕산성 서문이다. 하지만 막상 서문에 도착하자 성문은 보이지 않고 곳곳에 성을 쌓은 돌더미만 수북하다. 서문에 올라서자 갑자기 눈 앞에 확 트인 초원이 펼쳐진다. 그래. 저 6만 평에 이르는 드넓은 초원을 은빛으로 두르고 있는 솜이불 같은 저게 화왕산 십리 억새밭이다.
화왕산. 화왕산은 홍의장군 곽재우와 의병들이 왜적과 맞서 싸운 호국영산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명산이 아니던가. 안내 자료에 따르면 화왕산은 불의 산답게 아주 오랜 옛날 화산활동이 매우 잦았다고 한다. 화왕산성 동문 쪽에 보이는 못 3개도 그때 생긴 분화구라고 한다.
저만치 동문 쪽에도 화왕산성이 꿈틀거리는 용처럼 빙 둘러쳐져 있다. 사람 키를 훨씬 넘는 은빛 억새가 넘실대는 화왕산성 안에는 마치 오일장이 열린 것처럼 막걸리와 소주, 파전, 도토리묵 등의 먹거리를 파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남쪽 억새밭에서는 <화왕산 갈대제>라는 현수막이 노랫소리와 어울려 춤을 추고 있다.
"내 참, 갈대는 하나도 없고 억새뿐인데 웬 갈대타령이야? 행사장에 가서 좀 따지려고 하니까 담당자가 없다는구먼."
"아, 그거예. 예전에는 저 아래 보이는 세 개의 못 안에 갈대가 무성했어예. 그래서 갈대제라 부르게 되었지예."
"그래도 지금은 갈대가 하나도 보이지 않지 않습니까?"
"그라모 저녁 여섯 시에 산신제 할 때 주최 측에 한번 따져보이소."
우리 일행들이 화왕산성 안 장터처럼 북적대는 곳에 아무렇게나 퍼질고 앉아 막걸리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푸념을 하고 있을 때 옆에 앉은 사람이 끼어든다. 눈가에 잔주름이 많이 패인 걸로 보아 나이가 육십대 남짓해 보인다. 하지만 여섯 시까지 기다릴 수는 없다. 어두워지기 전에 서둘러 산을 내려가야 한다.
이곳, 서문 쪽에서 곧장 앞으로 나아가면 창녕 조씨 득성비와 세 개의 못을 지나 화왕산성 동문에 닿게 된다. 그리고 북쪽으로 뻗은 산성을 따라 10여 분 더 올라가면 화왕산 정상이며, 남쪽 능선을 따라가면 바위 위에 배를 매어두는 고리가 있었다는 배바위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우리 일행들이 그곳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다.
오후 5시. 갑자기 오소소 한기가 든다. 우리 일행은 남은 막걸리를 서둘러 마시고 은빛 억새에게 안녕, 이란 인사를 한 뒤 천천히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는개가 걷히고 저녁 안개가 자리바꿈을 하고 있는 자하계곡에 깔려오는 어스름과 창녕의 서녘하늘에 피처럼 시뻘겋게 물드는 노을을 가슴 깊숙이 담았다.
그래. 올 가을에는 은빛 억새가 피처럼 붉은 노을을 물고 춤을 추는 화왕산 십리 억새밭으로 가자. 가서 단풍이 불타는 자하계곡, 보랏빛 안개가 단풍과 어우러지며 아름다운 가을 놀을 피워 올린다는 그 자하계곡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 누군가 애타게 그리울 때면 잃어버린 첫사랑의 그림자처럼 서럽게 지는 가을 놀을 바라보자.
☞가는 길/서울-경부고속도로-구마고속도로-창녕 IC-좌회전-국도 24호선-창녕여중-화왕산 매표소-자하문-도성암-환장고개-화왕산성 서문-십리 억새밭-화왕산 정상.
※1. 산행기점은 창녕여중 및 옥천리 매표소 2곳이다. 봄의 진달래 산행은 옥천리 매표소에서 관룡사-관룡산 정상-화왕산 정상으로 갔다가 창녕여중 쪽으로 내려오는 것이 좋다.
※2. 입장료/어른:1000원(단체 800원) 학생:600원(단체 400원) 어린이:200원(단체 150원). 단체는 30명부터. 주차료/승용차 2000원, 버스 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