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 비늘 더듬으며 짙푸른 가을하늘 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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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봉우리 삐쭉삐쭉 솟은 창녕 "관룡산"



남도의 산들은 아직도 초록빛을 끈질기게 물고 있다. 하지만 초록빛을 비집고 스며드는 따가운 가을햇살에 초록물이 조금씩 빠지면서 노랑, 빨강 물감이 천천히 스며들기 시작한다. 저만치 계곡 비탈에 위태로이 뿌리를 박고 있는 성질 급한 옻나무는 어느새 잎사귀마다 시뻘건 핏방울을 굴리고 있다.

곳곳에 새털구름을 목도리처럼 깔아놓은 가을하늘은 그 어느 계절보다 짙푸르고 높아 보인다. 연보랏빛 손가락을 한껏 펼친 억새가 훤칠한 아랫도리가 썰렁하다는 듯 진종일 마른 몸을 부비고 있다. 거울처럼 맑게 빛나는 소(沼)에는 일찍 떨어진 나뭇잎 몇 개 "낮에 놀다 두고 온 나뭇잎 배"처럼 떠돌고 있다.

관룡사에서 바라보는 관룡산(739m) 마루에는 온통 날카로운 바위 봉우리가 삐쭉삐쭉 솟아나 있다. 기기묘묘한 형상을 한 바위 봉우리들이 마치 여의주를 입에 문 용처럼 금세라도 용트림을 하며 창녕의 짙푸른 하늘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온몸에 용비늘처럼 촘촘히 박힌 바위 하나 툭 떨구며.



관룡산은 원효대사가 백일 기도를 드릴 때 화왕산에 있는 세 개의 못에서 아홉 마리 용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하여 이름 붙인 산이다. 그 때 원효대사는 자신이 백일 기도를 했던 그 가람 이름을 관룡사라 짓고, 그 관룡사를 품고 있는 뒷산을 아홉 마리의 용이 날아오른 산이라 하여 구룡산으로 불렀다고 한다.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고암면에 둥지를 틀고 있는 관룡산은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왜냐하면 관룡산과 키 겨루기를 하며 이어진 능선 서편에는 십리 억새밭과 홍의장군 곽재우의 격전지로 널리 알려진 화왕산(757m)이 떡 버티고 서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산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금세 관룡산이 화왕산 못지 않게 뛰어난 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룡산은 계곡 곳곳에 숨은 절경뿐만 아니라 정상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바위 능선은 설악산의 공룡능에 버금갈 정도의 천길 낭떠러지가 이어진다. 고소 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감히 깎아지른 바위 능선을 탈 엄두조차 내기 어려울 정도다.

게다가 관룡산과 구룡산 산마루의 기기묘묘한 바위 능선을 지나 화왕산으로 가는 산마루 곳곳에는 은빛 억새가 끝없이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물고 무지개빛 물결을 아름답게 출렁이고 있다. 그 은빛 억새의 물결 속에 포옥 파묻히면 마치 구름을 타고 푸르른 가을하늘을 새처럼 훨훨 날아다니는 것만 같다.



관룡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옥천 매표소에서 관룡사를 지나 관룡산 산마루에 올랐다가 진달래 능선을 지나 화왕산 산마루를 거쳐 창녕여중으로 내려오는 길이다.(4시간 소요) 다른 하나는 창녕여중 앞 화왕산 매표소에서 환장고개를 지나 화왕산 산마루와 진달래 능선을 거쳐 관룡산 산마루에 닿았다가 관룡사로 내려오는 길이다.

그날 나는 관룡사를 지나 청룡암을 거쳐 관룡산 산마루로 오르는 산길로 접어들었다. 근데 가도 가도 산마루는 보이지 않고 기암절벽과 45도 이상 경사진 바윗길만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마치 하늘로 용트림하며 날아가는 용의 몸통에 촘촘히 박힌 용비늘 속에 꼼짝없이 갇힌 것만 같았다.

"무슨 산이 이리도 험해요?"
"그러니까 관룡산 아이요. 아, 용머리를 볼라카모 이 정도 고생쯤은 당연한 거 아입니꺼?"
"휴우! 지금껏 여러 산을 많이 타보았지만 이 산처럼 힘든 산행은 처음이네."
"쪼매마 더 참으이소. 바로 요 위 청룡암 근처에 약수터가 하나 있거든예."



그랬다. 처음부터 나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을 오르던 50대 초반의 사내 말처럼 머리가 바위에 부딪칠 정도로 구부리며 조금 더 올라가자 거짓말처럼 바위틈에서 맑은 약수가 졸졸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곳에서 물을 한 바가지 마시고 한숨 돌린 뒤 앞을 바라보자 갑자기 60도 이상의 비탈진 바윗길이 앞을 턱 가로막는다.

몹시 가파른 비탈길에 밧줄까지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이제 용의 모가지 정도쯤 올라온 모양이다. 하지만 바위산 중턱 그 어디에도 첫눈에 확 반할 정도로 곱게 물든 단풍은 보이지 않는다. 축축히 젖은 수건을 쥐어짜자 마치 물에 금방 적신 것처럼 땀방울이 주르륵 떨어진다. 웃도리와 바지도 축축하다.

근데, 어찌된 셈인지 저만치 산마루가 보이는데도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설마, 하며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밧줄을 힘차게 거머쥐었다. 그리고 새파란 하늘을 물고 '약 오르지' 하며 혀를 낼름거리는 산마루를 향해 한 발 또 한 발 내디뎠다. 이건 숫제 등산이 아니라 바위타기 훈련을 하는 것만 같다.

용을 쓰며 마침내 산마루에 오르자 거세게 몰아치는 바람에 이내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내가 올라온 바윗길을 바라보아도 용머리를 따라 가는 길 저 편에도 아찔한 절벽뿐이다. 한 손으로 밧줄을 움켜쥐고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용머리를 향해 위태로운 바윗길을 한 발 한 발 내딛는다. 이곳에서는 아차, 하는 순간 끝장이다.

용머리에 다가갈수록 바람이 더욱 거세다. 아마도 하늘로 날아오르려 용트림하는 용이 나를 떨구어내기 위해 콧김을 씩씩 뿜어대는 모양이다. 용머리에 오르자 저만치 화왕산성이 은빛 억새를 흔들며 어서 오라는 듯 손짓한다. 단숨에 달려가고 싶다. 하지만 아까 바위산을 오르며 용을 많이 쓴 탓에 힘이 너무 빠졌다.

"야호~"
"야호~"



관룡산 용머리에 앉은 나는 사람들이 사는 마을을 바라보며 두 손을 입에 대고 '야호'하고 소리쳤다. 그러자 사람들이 사는 산 아래 아득한 마을에서도 '야호'하는 정겨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다시 한번 '야호'하고 소리치자 이번에는 저쪽 산마루에서 '어여 내려가, 길 잃을라'라는 용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그날, 나는 관룡산 용머리에 앉아 저 푸르른 가을 하늘을 훨훨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저만치 아득한 곳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정겨운 마을이 보였다. 나는 반짝이는 용비늘이 되어 가을햇살을 타고 그 마을에 포근히 내려 앉았다. 그리고 그 마을 들머리에서 이 빠진 사발에 막걸리를 철철 넘치도록 부어 마시며 관룡산을 가슴 깊숙이 품었다.

☞가는 길/서울-경부고속도로-구마고속도로-창녕 IC-좌회전-국도 24호선-창녕여중-계성-옥천마을-옥천매표소-관룡사 입구-관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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