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어머니께서 쌍꺼풀 수술을 했습니다
팔순 어머니께서 쌍꺼풀 수술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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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행복’, 이 세상에 없다



어머니는 올해로 일흔 여덟 살이 됩니다. 얼마 안 있어 팔순인 셈이지요. 그런 어머니께서 쌍꺼풀 수술을 하셨습니다.

멋을 부리기 위해서냐고요. 그건 아닙니다. 어머니는 평생을 화장 한번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분이십니다. 물론 좋은 옷도 입지 않으셨지요. 소위 유행과는 무관하게 살아오신 분이 우리 어머니였답니다.

언제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서 눈에 무엇이 끼인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간질간질 눈을 괴롭히다가 어느 순간 톡 쏘기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내색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지나가는 소리로 눈이 조금 아프다고만 할뿐이었습니다. 비단 눈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머니의 삶을 뒤쫓다보면 아픈 상흔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합니다. 그 상흔 앞에 저는 매번 가슴을 졸이곤 했습니다. 유년 시절에는 저 때문에, 제가 직장을 잡고 가정을 가졌을 때는 어머니 당신 때문에 매번 가슴을 졸이곤 했습니다.

저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기차를 타보았습니다. 영동에서 마산까지 가는 기차였습니다. 제 손에는 차표와 종이 쪽지가 들려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병든 몸을 이끌고 동구 밖까지 나오셨습니다.

제가 동네를 벗어나 산 능선을 넘을 때까지도 아버지는 그림처럼 그 모습 그대로 서 계셨습니다. 그날 아버지가 제게 말했습니다. 너는 마산에 있는 네 어머니에게 가라. 아버지는 제 손에 종이 쪽지를 쥐어주었습니다. 어머니의 주소였습니다.

그후 저는 단칸방에서 어머니와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행상을 다니셨습니다. 발이 부르트고 무릎이 쑤실 때까지 어머니는 행상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밤이면 어머니는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기침 때문이었습니다. 끊어질 듯하다가도 이어지는 어머니의 기침소리는 저를 몹시도 불안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하나. 그러면 나는 학교에도 나가지 못할 것이고….

그러나 어머니는 단 한번도 제 학비를 지체한 적이 없었습니다. 시장에 버려진 배춧잎으로 김치를 담가 먹을 때도 어머니는 제게 책을 사주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때로는 유행에 맞는 옷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어머니의 삶은 이랬습니다.

지금 저는 두 아이의 아버지입니다. 그럭저럭 먹고사는 데는 지장이 없습니다. 아이들도 건강하고 아내도 알뜰합니다.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살다보니 인생이 행복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정말이지, 마냥 인생이 이렇게 행복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어디 세상이 그렇게 순탄만 하겠습니까.

완전한 행복은 적어도 이 세상에는 존재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어느 가정이든 우환이 없는 가정은 없을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가난과 병으로 일관해온 어머니의 삶을 돌아볼 때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아리고 쓰린 가슴은 이미 옛말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제게 남아있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눈물밖에 없습니다.

지금 어머니의 눈자위는 붉게 물들어 있습니다. 쌍꺼풀 수술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종종 눈의 통증을 말하곤 했습니다. 무언가가 눈을 자꾸 찌른다는 거였습니다. 아마 눈썹이었을 겁니다. 해서 시도한 게 쌍꺼풀 수술이었습니다.

수술 직후 어머니는 몹시 기뻐했습니다. 모든 게 또렷하게 보인다는 거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 어머니는 다시 통증을 호소했습니다. 이전보다 앞이 더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습니다.

이미 어머니는 한쪽 눈을 실명했습니다. 나머지 한쪽 눈도 언제 실명할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한시도 성경책을 손에 놓지 않습니다. 새벽이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성경 읽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오늘따라 어머니의 모습이 더 엄숙해 보이십니다. 그 숙연함이 성경소리에 묻히고, 어머니는 더 힘차게 찬송가를 부르시는 거였습니다.

아, 어머니, 내 어머니의 삶은 매양 이와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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