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군의문사위에 따르면 1951년 1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 훈련 중 구타당해 초주검이 된 상태로 삼촌 집에 유기된 뒤, 사흘 만에 사망한 故박술용씨(당시 24세)에 대해 최근 개최된 육군본부 전사망심의위원회가 순직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1955년 6월 한 달간 국방부가 국민방위군 전사망자 등록을 거쳐 331명에 대해 사망급여금을 지급한 이후, 법원의 판결을 거치지 않고 처음으로 국민방위군 희생자의 순직을 인정한 것이다.
故박술용씨 사건은 지난해 3월 13일 고인의 딸 박유순씨가 한국전쟁 중 소집돼 훈련 받다 부상당해 사망했음이 명백하다며,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요구하며 군의문사위에 진정을 제기해 조사가 이뤄졌다.
軍의문사위 조사과정에서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훈련이나 이동 중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아 직접적 사망관련 사실을 확인할 수 없었으나 의문사위는 고인의 거주지인 울산 인근에 국민방위군 교육대가 위치했으며, 부상자를 치료하던 병원이 부산 마산 등지에 위치했다는 것을 근거로 고 박술용씨가 징집됐고, 부상당해 치료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와 함께 군의문사위는 1951년 1월경 징집된 지 얼마 뒤인 2월 13일경 군복 입은 사람들이 고인을 트럭에 싣고 와 내려놓고 도망치듯 가버렸다는 진정인의 이웃과 친척 등 참고인들의 일관된 진술도 사실로 받아들인것이다.
군의문사위는 “한국전쟁 당시 대다수 국민방위군에게 소집영장 발부는커녕 군번조차 부여하지 않았던 점에 비추어 고인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지만,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군의문사위의 조사결과를 토대로 육군본부 전사망심의위원회는 “고인은 1951년 2월 16일 교육 훈련 중 구타에 의해 상해를 입고 사망했으며, 국방부 훈련 제293호 전공사상자처리규정에 의거 순직으로 가결 조치됐다”고 확인했다.
56년 전 남편을 잃고 두딸을 키워온 박술용 씨의 부인 이남희 씨는 “설을 쇠고 면회가려 했으나 가지 못하고 있던 중 남편은 얼마나 맞았는지 정신도 못 차리고 거반 죽은 사람이 돼 시삼촌 집으로 왔던 것”이라며 뒤늦게나마 군당국이 순직 결정한 사실에 대해 안도와 기쁨을 표시했다.
하지만 고인과 유가족들이 국가의 배려를 받기 위해서는 아직도 남아있는 과정이 있다. 현행 법상 ‘국가유공자 및 그 유족.가족요건 해당여부’ 결정은 국가보훈처의 보훈심사위원회 심의.의결 과정을 거쳐야 한다.
軍의문사위 이해동 위원장은 “육군본부에서 고인과 유족의 명예회복 조치가 이뤄진 것을 뜻 깊게 생각한다”며 “앞으로 우리 위원회의 활동이 더 많은 유가족들의 맺힌 한을 풀고, 군에 대한 신뢰회복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매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 국민방위군 =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 시기인 1951년 1월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1950년 12월11일 설치법 공포)을 편성했으며, 당시 군수뇌부를 포함한 간부들이 예산을 유용, 양곡과 피복 등을 빼돌려 약 9만여명이 추위와 배고픔,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
국회는 1951년 4월 30일 국민방위군의 해체를 결의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국민방위군 사령관 김윤근과 부사령관 윤익헌 등 5명은 사형이 선고돼 그해 8월 12일 총살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