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후보가 ‘이명박 대항마’로 대선 전면에 나설 수 있는 방안 중 하나인 범여권 후보단일화는 정동영, 문국현 후보로 압축, 이 후보는 논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후보 정책토론회 또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이리저리 자리를 피하고 있다. 이 후보는 정동영 후보에게 후보단일화에 나서라고 압박하는 한편 서부벨트의 완성을 통해 ‘李風’을 이뤄내겠다는 포부를 내세운다.
“큰 놈이 작은 놈을 잡아먹는 시대가 아니라 빠른 놈이 느린 놈을 잡아먹는 시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후보가 가야 할 길은 멀기만 하다. 대선 3수를 하며 낙인찍힌 ‘철새정치인’ 이미지를 안고 있으며 조순형 의원과의 불화도 발목을 잡고 있다.
출마선언과 동시에 범여권 2위로 올라선 조순형 후보를 역대세론으로 눌렀을 때만 해도 이인제 후보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불안한 화합, 불안한 지지율
대선3수생의 역량이 발휘된 것이라며 범여권 후보단일화는 물론 이명박과의 대결도 어렵지 않다는 의기양양함이었다. 당 지도부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다는 말도 흘러나왔다. 하지만 당심은 이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조순형 후보가 전격 후보직 사퇴를 선언하고 돌아앉자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쳐 냈다’며 좋지 않은 분위기가 흐른 것.
이 후보와 비슷한 모습으로 당 대선후보 자리를 꿰찬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는 손학규, 이해찬 후보에게 선대위원장을 맡기고 당 화합에 힘썼다. 하지만 이 후보는 조 후보와 벌어진 갈등의 틈을 메우지 못했다.
지지율도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이 후보가 민주당 대선후보로 선출된 10월16일 직후 이 후보의 지지율은 3.3%대에서 7.6%대로 치솟았다. 하지만 곧 3.0%대로 떨어져 당 경선 효과가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10월29일부터 30일까지 조사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2.2%로 이전 조사에 비해 0.8% 하락했다. 이명박 후보는 52.1%, 정동영 후보는 18.6%였다. 문국현 후보 10.3%, 민노당 권영길 후보 3.9%로 이 후보는 범여권 4자구도 형성도 힘에 부치게 됐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범여권 단일후보 논의에서 이 후보를 제외하기도 했다. 정 후보와 문 후보에 비해 턱없이 낮은 지지율에 단일화 효과가 미미할 것으로 분석한 결과다.
뱃사공만 16명…이인제號 출항
이 후보는 역전의 발판을 서부벨트에서 찾았다. 자신의 고향인 충청과 국회의원직에 당선됐던 강원도, 민주당의 텃밭인 광주를 잇는 서부벨트를 구축해 시너지 효과를 누리겠다는 계산이다. 수도권과 충청·호남을 잇는 서부벨트가 복원된다면 한나라당의 ‘동부벨트’와 대결구도를 부각시키겠다는 의도도 들어 있다.
이 후보는 이를 위해 우선 충청도에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대선후보 확정 이후 충청지역에 살다시피 하며 텃밭 다지기에 매진했다. 또한 민주당의 심장부인 호남이 아닌 충청에서 선대위 출범식을 가져 충청도에 대한 애정을 과시했다.
10월30일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 및 당원 1만인 전진대회에서 이 후보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영남 출신이 5명, 호남 출신이 1명이지만 충청 출신은 1명도 없다. 그런 뜻에서 충청지역에서 대통령이 되는 게 역사의 순리”라며 ‘충청 대통령’론을 내세웠다.
이 후보는 이어 “민주당이 이인제를 후보로 내세운 것은 호남 고립을 깨고 지지기반을 서부벨트로 확대하고, 영남 중산층의 기반을 이끌어내 대역전극을 이루라는 큰 뜻”이라며 “계백장군이 돼 민주당을 부활시키고 개혁정권을 세우는 데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박상천 민주당 대표는 “정책노선, 인물, 도덕성 세 가지가 모두 비교 우위에 있는 이인제 후보가 대통령감인데도 과거의 경선 불복과 당적 변경 등을 이유로 국민들의 마음이 얼어있다”면서 “이 후보가 지난 10년간 많은 고통을 받아왔고 반성과 성숙의 단계를 거쳤으니 과오에 대한 마음을 열어달라”며 지지를 호소했다.
공동선대위장을 맡은 김민석 전 의원은 ‘다시보자 이인제, 만져보자 이인제’를 대선 필승 구호로 내세웠다. 김 전 의원은 “이번 대선에서 이 구호를 통해 ‘이인제 다시보기’가 시작되고 오늘의 선대위 출범은 이인제 다시보기 운동의 출발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 후보 선대위는 상임 선대위원장 외에 공동선대위원장을 15명이나 두는 집단지휘체제를 마련, 박상천 대표가 상임 선대위원장을 맡았다. 김민석·김성순(수도권) 최인기 (호남) 김영환(충청) 이치호(영남) 이용삼(강원) 홍성제(제주) 최명헌(이북5도) 고재득(총무) 김충조 유승규(조직) 장재식(재정) 신낙균(정책) 김경재(홍보) 최영희(여성) 이협(대외협력담당) 등 15인이 공동선대위원장에 임명됐다. 후보 비서실장은 이상열 정책위의장이 맡았다.
명예선대위원장에는 장상 전 대표와 김종인 의원을 선임하고 손봉숙 의원, 김상현 이윤수 유용태 전 의원을 상임의원에 임명했다. 하지만 조순형, 신국환 의원은 선대위에 합류하지 않아 경선과정에서 쌓인 갈등이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줬다.
호남, 이인제에 매정할 순 없지
1일 전남 고흥을 방문, ‘고흥 군민의 날’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광주를 찾았다. 3일과 4일에도 전남 해남과 보성 일대 등을 순회하면서 표심잡기에 나섰으며 9일과 13일에는 각각 광주시당과 전남도당 당원전진대회에 참석하는 등 호남지역 공략을 이어갔다.
이 후보는 “호남에 고립되어 있는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서부벨트 전역으로 확장시켜야 영남을 기반으로 지역패권 유혹에 빠져 있는 한나라당을 이길 수 있다”며 지지를 호소했다. 박상천 대표도 이 후보의 호남 방문에 동행, ‘호남공략’에 힘을 실어줬다.
정치권은 이 후보가 발품을 팔아가며 호남 이곳저곳을 밟는 것에는 서부벨트뿐 아니라 2002년 대선 빚을 확인시키려는 의도로 보고 있다. 호남의 맹주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선에는 ‘이인제 효과’가 결정적 영향을 줬던 만큼 도움을 청한다면 뿌리치지 못하리라는 계산에서 비롯된 의도적 움직임이라는 것이다.
이인제 후보는 “이인제 사전에 배신은 없다. 민주당에 뼈와 혼을 묻겠다”며 꼬리표 떼기에도 열성을 다하고 있다. 두 번의 경선불복으로 찍힌 ‘철새 정치인’이라는 낙인이 앞길을 막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 후보는 ‘만져보자 이인제, 다시보자 이인제’에 대해 “만져보자는 것은 다시 한번 확인하자는 뜻이고 다시보자는 것은 10년이 지나고 있으니 새로운 관점에서 평가해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동안 경선을 불복했다 탈당했다 했지만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것이 아니고 깊은 충정에서 고뇌 끝에 어렵게 결정들을 했던 것”이라며 그의 충정을 따뜻하게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이해를 구했다.
박상천 대표도 ‘뉴 IJ(이 후보 이니셜) 플랜’을 강조하면서 “민주당을 쪼개고 나가 열린우리당을 만든 정동영 후보를 호남이 용서했다면 이인제도 용서해야 옳다”고 말했다.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지만 얼음이 녹으면 생명의 물이 되듯이 저에 대한 미움이 녹아 더 큰 지지로, 불신이 풀려 큰 믿음으로 폭발할 것을 확신한다”는 이 후보의 말처럼 그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가 지워진다면 서부벨트 완성도 멀지 않지 않겠는가.
정동영에 단일화 압박
이인제 후보가 필승전략으로 내세운 서부벨트는 그 효과가 미지수로 남겨진 최후의 노림수다. 때문에 이 후보는 서부벨트 구축을 위해 부지런히 뛰어다니면서 범여권 단일 후보 논의에 불을 붙이려 하고 있다.
그는 “11월 중순 전후면 개혁세력 대표에게 국민의 지지가 몰릴 것으로 예상했는데 이명박, 정동영 후보가 국민 앞에 나란히 서서 토론하는 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비교평가를 받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며 은연중 이·정 후보와의 토론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그는 이어 “시기가 늦어지고 있지만 12월19일 이전에는 범개혁세력의 단결과 낡은 수구세력의 집권을 막고자 하는 국민의 힘이 하나로 뭉쳐서 분출이 될 것”이라며 11월25∼27일인 대선후보 등록일 이후에도 후보단일화가 진행될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는 정 후보나 문 후보가 후보단일화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보이는 것과는 다른 태도다. 이 후보는 일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독자적으로 나설 수도 있냐’는 질문에 “그렇게까지 비약하지 않았으면 한다”며 후보단일화에 대한 의지를 다시 한번 확인했다.
정 후보가 미적거리자 “민주당을 깨고 개혁을 열망한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린 대통합민주신당의 정 후보가 범개혁세력의 단일후보 만들기를 거부하고 있다. 호남후보 필패론을 정면돌파하겠다는 그의 주장은 개혁세력의 고립을 부추기고 결국 호남 국민들의 열망에 찬물을 끼얹는 마지막 배신행위”라고 비난, 정 후보를 압박했다.
서부벨트를 끌어안고 후보단일화, 이명박 후보와의 결전에서 역전을 이루겠다고 벼르고 있는 이인제 후보. 이 후보의 ‘내공’이 또 한번의 역전을 이뤄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