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이 흐른다. 그것은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사이의 좁은 골짜기를 흘러내렸다. 강은 흐르다가 대전분지에서 보성천과 합류했고, 청주분지에서 미호천과 합류했다. 산골짜기를 흐른다기보다는 들판을 흐르는 강이다.
군산과 강경 사이는 강 너비가 넓고 수심이 깊어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 만조를 이용해 부여 가까이 까지도 돛단배로 항해할 수 있다. 게다가 작은 배로는 부강까지도 갈 수 있어 호남선 개통 이전에는 해안과 내륙지방을 잇는 교통로로서 큰 구실을 한 강이었다.
그러나 철도가 개통되고 부터는 수운의 이용이 줄어들었고, 흙모래가 쌓여 부여 위로는 운항할 수 없다.
강이 흐르는 들판은 질펀했고, 계곡은 깊었다. 그래서 들판과 계곡에는 사시사철 안개가 끼어 있었다. 발원지에서 하류까지 적어도 천리는 좋이 흐르는 강의 연안에는 언제나 짙은 안개가 끼게 마련이었다.
강의 중하류쯤에 강주(江州)라는 도시가 위치하고 있었는데 예외없이 안개가 자주 끼었다. 물론 그것은 강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강주는 대도시는 아니었다. 그러나 강을 사이에 두고 10만 인구가 모여 사는 알찬 규모의 강변도시였다.
강주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무엇보다도 사라진 옛 왕국의 수도였다는 사실과 강의 북쪽에 유구한 역사의 국립대학이 서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 국립대학은 일제시대부터 존재했던 국내 몇 안되는 대학 중의 하나였다. 강을 내려다보고 있는 나지막한 둔덕에 자리잡고 있다. 양지바르고, 바람이 불어가는 둔덕 주변에는 숲이 울창했다.
강의 남쪽 구시가지의 한구석에 위치하고 있던 이 학교는 20년전쯤에 여기 강의 북안으로 교사를 지어 이사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학교 주변에는 민가가 많지 않았다. 학생들을 하숙치기 위한 시멘트 블록집들이 녹음 속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국문과의 홍 영희 교수는 강의를 마치고 자신의 연구실로 와서 쉬고 있었다. 오래간만에 하는 강의라 힘이 들었다. 근 석 달에 걸친 긴긴 겨울방학을 끝내고 처음으로 하는 강의였다.
아직까지 자신의 아파트에도 들러 보지 못했다. 홍 교수는 가족들과 함께 서울 강남의 아파트 지역에 살고 있었고, 강주에는 조그만 독신용 아파트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 새벽 첫버스로 개학에 맞추어 여기 강주로 내려온 것이다.
30대 후반일까. 40대 초반일까. 잘 분간이 가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는 그녀였다. 깨끗한 피부와 짙은 머리숱, 그리고 큼직한 눈과 날씬한 몸매는 그녀를 30대의 여인으로 짐작케 했으나, 왠지 모르게 얼굴과 전신에 어려 있는 기품 있는 분위기는 그녀를 40대의 여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깨끗하게 정돈된 연구실에는 이른봄의 햇살이 스며들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에는 잔디밭이 펼쳐져 있었고, 학생들의 말소리가 간간이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도 봄을 따라 들판으로 날아든 박새나 멧새들의 지저귐과도 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역시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것만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그녀는 언제부터인가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소파에서 일어나 창문께로 걸어갔다. 날씬하고 탄력적인 몸매다. 아울러 그것은 알 수 없는 감칠맛을 풍기는 분위기를 거느리고 있었다. 베이지색 모직 투피스의 스커트 자락 밑으로는 쪽 곧은 두 개의 다리가 뻗어 있었고, 그 위로는 상당히 살이 오른 두 개의 둔부가 가느다란 허리를 떠받치듯 돌출되어 있었다.
지성미와 육체미를 아울러 갖춘 중년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두터운 모직투피스의 볼륨으로써도 결코 감출 수 없는 앞가슴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가슴은 자체의 율동과 호흡을 가진 듯 조용히 흔들리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