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나에게 불법을 저지르도록 만들었다. 죄인으로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 삼성그룹 전 법무팀장이었던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 5일 기자회견을 자처하며 고백한 말이다. “근거없는 허위 폭로를 하고 있다. 삼성에 돈을 요구했다가 여의치 않자 보복심이 발동한 것 아니냐.” 삼성그룹이 김 변호사의 기자회견 직후 25쪽 분량의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반박한 핵심이다. 현재 사회 전반을 뒤흔들고 있는 ‘삼성 비리 의혹’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폭로 당사자인 김 변호사나 반박에 나선 삼성그룹 모두 무엇이 비리인지, 아닌지에 대한 결정적인 물증은 내놓지 않고 있다. 양측의 설전만이 오갈 뿐이다. <시사신문>은 김용철의 직격탄을 맞은 이건희 공화국의 이면을 집중 취재했다.

그렇다면 폭로와 반박이 거듭되고 있는 삼성 비리 의혹은 무엇일까. 5가지 의혹을 중심으로 양측의 주장을 살펴봤다.
폭로vs반박 1. 차명계좌 의혹
‘관리의 삼성’이라고 불릴 만큼 임직원들을 철저하게 관리해 온 삼성 내부의 첫 폭로가 첫 발생했던 것은 지난 10월29일. 김 변호사가 사제단을 통해 “삼성이 차명계좌를 만들어 비자금 50억원을 관리해왔다”고 밝혔다.
당시 사제단이 삼성비자금 의혹에 대한 물증으로 제시한 것은 우리은행 계좌 3개와 신한증권계좌 1개로 김 변호사는 본인의 동의 없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했다. 또한 4개의 계좌 중 하나는 보안계좌로 분리돼 정작 본인의 이름으로 개설된 계좌임에도 조회조차 거부당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분명 김 변호사가 계좌를 눈치 채자 삼성에서 미리 손을 써놨더라는 것.
하지만 삼성은 “그룹과 관계없는 돈”이라며 반박했다. 삼성그룹에 따르면 김 변호사가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 재무팀에 근무할 당시 동료에게 동의하에 차명계좌를 빌려줬고, 그 동료는 김 변호사의 차명계좌로 한 재력가의 돈을 위탁 관리했다. 지난 1998년부터 약 7억원의 개인재산을 계좌에 입금해 삼성전자 등 주식에 장기 투자했고, 이후 주가가 상승해 50억원에 달하게 됐다는 것이 삼성그룹의 설명이다.
삼성그룹은 “계좌의 거래목록이 밝혀지면 회사 비자금과 관련 없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될 것”이라며 명백함을 주장했다.
폭로vs반박 2. 분식결산 의혹
‘삼성 비자금’은 삼성 계열사들이 이중장부를 통해 수주금액을 부풀리고 건설공사 등의 분식회계로 천문학적 규모의 비자금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김 변호사와 달리 삼성그룹은 “사실무근”으로 일축했다.
삼성그룹은 김 변호사가 분식결산에 대한 의혹을 주장한 것에 대해 ‘김 변호사의 오인’으로 설명했다. 전문가가 아닌 김 변호사에게는 오해를 할 수 있을법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감가상각비, 대손상각비의 경우 재무 회계상으로는 기업회계기준에 따라 적정하게 처리된 비용일지라도 세법에 허용된 범위를 초과하여 처리되면 세무회계상으로 초과된 부분을 비용으로 인정하지 않고 결산기에 차이를 조정하게 된다. 이러한 조정업무를 회사의 분식회계로 오인했다는 게 삼성의 설명이다.
삼성그룹은 “회사는 통상 결산기에 회계처리 방법들을 비교 검토하거나 세무조정을 거쳐 최종결산을 하게 된다”며 “분식회계는 없으며 재무상황을 투명하게 공시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폭로vs반박 3. 검찰·법원 상대로 한 로비
“삼성에서 좋은 대우를 받고 사치를 하기도 했다. 대신 삼성은 범죄를 명했다. 돈으로 사람을 매수·회유하는 불법 로비는 모든 임원의 기본적 책무였다.”
김 변호사는 지난 11월5일 2차 기자회견을 열고 회견장에 직접 나와 삼성 비자금에 이어 로비의혹을 증폭시켰다.
김 변호사에 따르면 검사 출신인 본인이 직접 로비리스트를 작성했으며 이를 토대로 검찰 관리에 연간 10억원의 비용을 사용했다. 설·추석·여름휴가 등 1년에 3회, 5백만원에서 수천만원까지 돌렸다는 것. 현직 검찰 최고위급 간부들 중에서 삼성에게 ‘떡값’을 받은 사람이 여럿이라는 충격적인 발언도 이어졌다.
김 변호사는 “심지어 대형 부실을 안고 있는 만성적자의 회사에서도 수십억 원씩의 비자금을 만들었고, 조성된 비자금은 임직원 명의로 차명 운용된다”며 “삼성 출신 인사들이 재산이 많은 것은 대부분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밝혔다.
삼성그룹에서는 차명계좌의 존재가 승진의 징표이자 훈장으로 통해 비자금 계좌가 만들어지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도 있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주장이다. 그는 비자금 계좌를 가진 삼성 임원들의 명단 일부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삼성그룹은 김 변호사의 주장에 “허위사실”로 못을 박았다. 검사나 판사를 상대로 떡값이나 휴가비 등을 돌린 적이 없으며 김 변호사에게 그 같은 일을 지시한 바도 없다는 것이 삼성그룹의 설명이다. 로비명단의 유무에 대해서도 삼성은 “검찰 사정에 밝은 사람이라면 이런 명단을 반나절 안에 손쉽게 만들 수 있다”며 부정했다.
폭로vs반박 4. 회장 지시사항이 담긴 문건
이건희 회장의 ‘로비 지침서’도 공개됐다. 김 변호사는 지난 11월3일 삼성의 전방위 로비가 이 회장의 직접적인 지시로 이뤄졌다는 내용이 담긴 문건을 통해 주장했다.
김 변호사가 공개한 문건에 따르면 이 회장은 2003년 12월 보광휘닉스파크에서 “호텔 할인권을 발행해서 돈 안 받는 사람(추미애 등)에게 주면 부담이 없을 것”이라며 “금융·관계, 변호사, 검사, 판사, 국회의원 등 현금을 주기는 곤란하지만, (호텔 할인권을) 주면 효과가 있는 사람들에게 적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회장의 지시 사항이 담긴 문건은 그가 공식 회의나 자택에서 사장단에 지시한 내용을 그룹 구조조정본부가 정리해 김 변호사가 보관하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그룹은 문건의 존재에 대해 인정을 하면서도 ‘로비 지침서’이라는 주장은 왜곡이라고 반박했다. 이 회장이 식사자리나 일상생활에서 자유롭게 한 말을 수행하는 직원이 메모, 정리한 것일 뿐 단순히 참고할 사항은 몇 달에 한 번씩 당시 구조조정본부 임원들이 참고로 볼 수 있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와인이나 호텔할인권 선물에 대한 언급도 단순히 검토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회장의 발언에 대한 메모는 실제로 이행되지 않고 검토 단계에서 폐기된 것들이 많다고 해명했다.
폭로vs반박 5. 에버랜드 사건 조작 및 축소
무려 3년 반에 걸쳐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고 있는 에버랜드 사건도 김 변호사는 명백한 범죄임을 털어놨다.
김 변호사는 본인도 공범으로 밝히며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 재판 과정에서 증인과 증언이 조작됐다고 폭로했다. “자신 역시도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김 변호사는 이 회장을 위한 시나리오도 작성해 이를 토대로 모의연습까지 했다고 주장했다.
당시 에버랜드의 대표이사 등 임원이었던 허태학, 박노빈은 전환사채 발행 자체를 몰랐고, 검찰 수사를 축소하거나 무마하기 위해 로비를 벌였다는 것이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삼성그룹에서는 김 변호사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며 반박했다. 1심과 2심에서 유죄가 확정된 상태며 당시 비서실의 핵심 임원들도 모두 검찰에 소환돼 조사를 받은 바 있다고 설명했다.
허태학과 박노빈에 대한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면 그에 따라 이 회장을 비롯한 나머지 피고발인 31명에 대해서도 검찰의 최종적인 처분을 내릴 것으로 알고 있는 만큼 김 변호사의 주장은 터무니가 없다는 것이다.
삼성그룹과 김 변호사의 ‘핑퐁게임’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삼성 비자금 의혹’은 새로운 국면에 들어섰다. 지난 11월6일 참여연대ㆍ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이 검찰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검찰은 공정성 시비를 우려해 ‘떡값 검사’ 명단 공개 없이는 수사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어 갈등을 빚고 있다. 이에 따라 김 변호사의 히든카드인 로비 리스트에 이목이 더욱 집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