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가는 길은 막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탄 차는 막 덕유산을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7남매입니다. 막내가 마흔 넷이니 이제 모두 중년을 넘어섰습니다. 우리 식구는 두 칸 짜리 오두막집에서 살았습니다. 지붕은 양철로 되어 있어서 비만 오면 매양 콩 볶는 소리를 내곤 했습니다. 벽 또한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도배지(벽에 바르는 종이)는 꿈도 못 꾸던 시절, 벽지는 언제나 신문지로 대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이장 일을 보고 계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순전히 동네사람들의 호의 때문이었다고요. 평생을 병에 시달린 아버지에게, 논 밭떼기 하나 없이 사는 가난한 우리 식구들에게 동네사람들이 일종의 호구책을 마련해 주었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저는 어머니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를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한학에 능했습니다. 아버지의 글을 따를 사람이 면 전체를 통틀어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마땅히 이장 할 자격이 있는 분이셨습니다. 이것은 동네사람들의 공통된 인식이기도 했습니다.
우리 집은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한시도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어렴풋하게나마 기억이 납니다. 저는 종종 벽에 있는 흙을 갉아먹곤 했습니다. 아마도 제 몸 어딘가에 칼슘이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치약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치약이란 치약은 죄다 짜 먹었습니다. 달착지근한 게 여간 맛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물론 저만 그랬던 건 아닙니다. 그 당시 제 또래쯤 되는 아이들 대부분은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겁니다.
돌아보면 참으로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웬만큼 먹고살 게 된 지금까지도 그 가난의 상흔이 제 몸 구석구석을 떠돌고 있음이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지금도 제게는 이해하기 힘든 버릇이 있습니다. 과식하는 습성이 바로 그것이지요.
지금은 아니지만, 저는 어렸을 때 그랬습니다. 제 배는 언제나 축구공처럼 부풀어 있었습니다. 헛배였지요. 영양실조에 걸린 아이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그런 헛배였습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프리카에서 굶주리고 있는 아이들과 비교해 생각해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겁니다.
해서인지 예나 지금이나 저는 식탐 앞에서는 성정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음식을 보면, 어떤 음식이든 배불리 먹어야만 직성이 풀렸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도 그 버릇은 좀체 고쳐지질 않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 부대껴하면서도 어디 더 먹을 게 없나 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기도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으면서도 저는 연신 무언가를 주워먹기에 바쁩니다.
이틀 후면 설날입니다. 설날 하면 떠오른 게 '가래떡'입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게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길이는 30센티 정도 되었을 겁니다. 가래떡을 뽑는 날이면 동네 전체는 영웅담(?)으로 흘러 넘쳤습니다. 아무개집 누구는 가래떡을 스무 개를 먹었느니 하면서 서로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물론 가래떡만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동네 한 가운데는 거대한 가마솥이 내어 걸리곤 했었습니다. 동네 청년들이 돼지를 잡기 위해서였지요. 저는 지금도 잊지를 못합니다. 돼지의 목을 딸 때 내 지르는 그 처절한 비명소리를 말입니다.
저는 몇 점의 고기를 얻어먹기 위해 아침부터 그 주위를 서성거리곤 했었지요. 어른들은 양 볼이 볼록하게 튀어나올 때까지 입 속에 하나가득 고기를 집어넣곤 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돼지 내장은 언제나 돼지 잡는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먹을 복은 타고났나 봅니다. 동네 어른들이 앞다투어 고기를 한 점씩 제 입 속에 넣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한 목소리로 제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저 놈 배는 돌멩이도 소화시킬 거야!"
지금은 모든 게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오랜만에 먹은 고기로 밤새 화장실을 드나들어야했던 그 어린 시절, 그때가 바로 엊그제 같습니다.
이제 고향이 가까워오는 모양입니다. '인삼의 고장 금산'이라는 거대한 광고판이 막 눈에 들어옵니다. 그렇게 어렵게 살았던 내 고향 금산, 그 산하가 지금 제 눈앞에 펼쳐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