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건 전 총리의 여의도 재입성을 부추기는 이유는 이러하다. 범여권은 후보단일화 논의에도 불구 나아지지 않고 있는 후보들의 지지율로 인해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인정받은 행정능력과 한때 대선후보 지지도 1위를 달렸던 고 전 총리로 역전의 발판을 노려보겠다는 것이다.
고 전 총리가 대선정국에 등장할 경우 범여권은 물론 중도보수성향의 한나라당 지지자들까지 넘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도 섞여 있다. 우려도 적지 않다. 후보들이 난립하는 상황에 고 전 총리까지 나서면 그나마 진행되던 후보단일화 마저 주춤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정치권에 고건 전 총리 ‘대안론’이 제기되며 지지자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다. 이들은 고건 대통령 추대 범국민 운동본부 준비위원회를 구성, 출마 촉구에 들어갔다.
다시 한 번 GO?
지난 1월16일 여·야의 잠룡들이 대선으로 쏟아지기 시작할 때 고 전 총리는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는 불출마 선언문에서 “깊은 고뇌 끝에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정치활동을 접기로 했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는 불출마 이유에 대해 “지난 일 년 가까이 나름대로 상생의 정치를 찾아 진력해 왔다. 그러나 대결적 정치구조 앞에서 나의 역량이 너무나 부족함을 통감한다”며 “기존 정당의 벽이 높아 현실정치의 한계를 느꼈다”고 밝혔다.
하지만 여의도와 그의 지지자들은 다시 한번 ‘高 GO’를 외치고 있다. 고건 대통령 추대 범국민 운동본부 준비위원회는 “대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인데도 다수의 국민들이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하고 있다. 이는 현재의 대선 후보들에 대한 국민적 불만이 큰 때문이다. 국민들은 새로운 대안을 기대하고 있다”며 고건 전 총리의 대선출마를 촉구하는 범국민 촛불집회를 열었다.
광주·전남지역과 서울, 경기, 경남 등 전국에서 모여든 고 전 총리의 지지자들은 “합리적 국정 철학과 풍부한 행정경험, 통합능력과 안정된 지도력, 검증된 청렴성 등을 통해 계층과 지역간 대립을 해소할 수 있는 적임자가 고 전 총리 유일하다”며 ‘고건 대통령’을 연호했다.
1975년 전라남도 지사를 시작으로 교통부 장관 및 농수산부 장관, 내무부 장관, 2번의 서울시장, 국무총리 등의 자리를 거친 고 전 총리는 ‘행정의 달인’으로 불렸다. 무색무취한 인물로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는 동안 고위 공무원으로 자리를 지켜 충분한 행정경험과 정치적, 경제적인 안정감을 가졌다는 평을 들은 것.
범여권 후보들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상태에서 이회창 전 총재가 출마선언을 하며 순식간에 20%대의 지지율에 연착륙하자 고 전 총리를 잊지 못하는 이들도 일제히 일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여의도 ‘고건 대안설’ 무성
고 전 총리의 지지자들이 그의 출마를 촉구한데는 범여권 내에 무성한 ‘고건 대안론’이나 ‘연대론’도 한 몫했다.
고 전 총리 대안론은 민주당 내 일부 인사들이 그를 접촉했다는 말이 나돌면서 시작됐다. 정동영 후보와 범여권의 답답한 앞날에 신당 내 민주당 계열 인사들이 고 전 총리를 언급하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민주당과의 합당을 통해 도약을 노렸던 정동영 후보가 ‘도로 민주당’ 비판에 직면하고 ‘범여권의 샛별’로 칭해지던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정치적 정체성으로 겉도는 모습을 보이자 금새 들어갈 줄 알았던 ‘고건 대안론’은 살을 부풀려갔다.
일각에서는 문 후보와 고 전 총리의 친분이 두텁다는 점을 들먹였다. 문 후보가 침체된 지지율을 올리기 위해 고 전 총리의 손을 잡아끌고 있다는 것. 이는 곧 ‘문-고 연대설’로 이어졌다. 문 후보측은 “문 후보와 고 전 총리가 가까운 것은 사실이지만 정치적 연대까지 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며 일축했지만 소문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이른바 ‘고건 출마 시나리오’가 거론되기 시작하며 고 전 총리 출마는 범여권의 화두로 떠올랐다. ‘고건 출마 시나리오’는 두 가지로 나뉜다. 고 전 총리가 이 전 총재처럼 무소속으로 출마, 범여권 후보들과 자웅을 겨루는 ‘대안’으로서의 등장이 그 첫 번째다.
두 번째는 창조한국당에서 출마, 문 후보와 겨뤄 단일화를 하고 신당과 민주당이 만든 단일후보와 최종 단일화를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고 전 총리는 범여권에 국민들의 시선을 모으는 ‘페이스 메이커’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시들해진 범여권 후보 단일화에 활력을 불어 넣는 ‘새 바람’이 되는 것이다.
고 전 총리가 정동영 후보 지지 또는 직접 출마 등의 요청을 받은 것으로 알려지며 이 시나리오가 정 후보를 위한 것이 아니냐는 관측도 제기됐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관건은 호남표 결집이 수도권의 호남표 결집에 어떤 영향을 미치느냐다. 만약 이번 단일화 효과가 미미하게 되면 결국 고건 전 총리가 출마를 하든 지지선언을 하든 그의 역할론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고 전 총리의 출마에 대해 구체적인 시나리오까지 나오자 정치권 일각에서는 “이미 불출마를 선언한 바 있는 고 전 총리가 말을 번복하는 일이 생긴다면 이 전 총재가 대선에 출마한 것 만큼이나 명문이 없다”는 비판 여론도 생겨나고 있다.
당사자 모르는 일
지지자들의 출마촉구 움직임과 ‘고건 대안론’에 숨어 있는 ‘킹’ 혹은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 달라는 요청에 고 전 총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의 측근인 김덕봉 전 총리 공보수석비서관은 “고 전 총리의 입장은 지난 1월 대선 불출마 및 불개입 선언을 한 데서 전혀 변화가 없다. 이번 대선 관련해서 어떤 입장도 표명하지 않을 것이다. 상황이 답답하다 보니 자꾸 고 전 총리 얘기를 꺼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고 전 총리가 지방행을 ‘출마를 결심하기 위한 장고가 아니냐’고 해석하는 이들에게 “고 전 총리가 현재 지방에 있으며 이는 대선 출마 여부를 고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요즘 이를 둘러싼 말들이 많아 잠시 피해 있기 위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선을 긋기도 했다.
고 전 총리의 또 다른 측근인사도 “내가 아는 고 전 총리는 지금 (대선과 관련해서) 움직일 사람이 아니다. 지난 1월 대선불출마 선언을 할 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고 전 총리의 ‘대선판 복귀’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것”이라고 못박았다.
정치권은 그러나 범여권 일각에서 고 전 총리에게 직·간접 채널을 통해 대선출마를 권유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고, 대통합신당과 민주당 일부 인사들이 조만간 고 전 총리 지지선언을 할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해 긴장을 늦출 수 없다는 반응이다.
정동영 후보 측 김현미 대변인도 “고 전 총리와 주변 분들의 입장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도 “국민이 뽑은 후보라는 정통성의 무게와 엄중함은 무엇보다 크다”고 경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