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재계에선 갑작스럽게 유명을 달리한 재벌가 사람들이 회자되고 있다.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 딸인 고 이윤형의 기일(忌日)을 계기로 기억의 저편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들에 대한 안타까움의 발로가 아닐까. 생을 이어가고 있다면 모두가 재계의 중심에서 움직였을 인물들이겠지만 세월의 무게만큼 세인들의 관심에서도 잊혀져 가며 애틋한 연민을 불러오는 지도 모를 일이다. <시사신문>은 구구절절한 사연을 안고 안타깝게 세상을 등진 재벌가 사람들의 역정을 되짚어 봤다.
국내 유수의 재벌가 대부분 ‘불운의 가족사’
지병·교통사고·실족사…사연 많은 인생사

하지만 고난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삼성그룹으로서는 마음 놓고 고인들을 추모할 여력이 없다. 삼성그룹 한 관계자는 14일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현재 계획된 추모행사는 없다”면서 “다만 이병철 회장의 경우 가족들과 몇몇 임원들이 용인 묘소를 찾을 것으로 보이고, 윤형씨의 경우는 가족끼리 조촐하게 지내지 않겠냐”고 말했다.
재벌가 황태자들 ‘불운의 연속’
사실 삼성가에는 안타까움으로 기억되는 인물이 한명 더 있다. 바로 ‘삼성가 비운의 황태자’로 재계에 회자되는 고 이창희 회장(옛 새한미디어)이 그다. 이병철 창업주의 차남으로 지난 1991년 7월, 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재계에선 사실 이윤형씨 보다 이창희 회장에 대한 기억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생전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을 겪어야 했고, 일찍 세상을 뜨지 않았다면 지금쯤 삼성그룹의 중심에서 존경과 선망의 대상으로 남았을 그다.
이창희 회장은 한때 삼성그룹의 황태자로 부각되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사카린 밀수로 파문을 일으킨 ‘한비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뤄야 했고, 한때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와 마찰을 빚으면서 경영에서 물러나는 역경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난 속에서도 보란 듯이 다시 일어났다. 오디오와 비디오테이프 사업이 국내에선 생소했지만 미국 유학 당시 사업성을 확인한 이창희 회장이 돌아와 이를 바탕으로 10여 년 만에 당시 새한미디어의 급성장을 일궈냈다. 이런 사업적 수완으로 이창희 회장은 이병철 창업주의 노여움을 풀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그에게 또다시 시련이 찾아왔다. 이병철 창업주가 지병이 악화되면서 갑자기 타계한데다, 충주공장 화재로 경영 근간이 흔들리고 만 것이다. 마음고생 때문이었는지, 그는 1991년 초 혈액암 판정을 받고 불과 4개월여 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SK가에도 한창 일할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황태자가 있었다. 고 최윤원 회장(당시 SK케미칼 회장)이 그다. SK가 맏형인 고 최종건 회장의 장남인 그는 2000년 8월, 50세를 일기로 미국에서 지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SK케미칼에 따르면 현재 경기도 화성의 ‘SK가 선영’에 선대회장들과 함께 영면해 있다.
최윤원 회장의 이름은 일반인들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한때 ‘SK 황태자’로 손꼽힌 인물이다. 창업자인 최종건 회장의 직계인 탓에 적통승계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경영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본인 스스로도 ‘경영에 자질이 부족하다’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해, 정착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마음만은 SK가에서 가장 넓었다는 평가다. 자리에 욕심을 낼만도 했지만 집안의 화목을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가화만사성을 실천한 까닭이다. 실제 그는 작은아버지인 고 최종현 회장이 작고한 이후 사촌동생인 최태원 회장이 SK그룹 경영권을 갖도록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가문의 우여곡절이 가장 많았던 곳은 사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현대가이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가족사로 재계에서 손꼽힌다. 교통사고에서 자살까지 정주영 창업주가 생전 가슴에 묻은 이들만 3명이다.
현대가문이 가장 먼저 비운을 맞은 것은 1962년이다. 정주영 창업주의 다섯째 동생인 고 정신영이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한 것이다. 정신영씨는 정주영 창업주가 특히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동생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대에서 '신영언론재단'을 설립한 것도 이 때문으로 전해진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그는 독일 유학시절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동생을 뜻하지 않게 잃은 정주영 창업주에게 시련은 또다시 찾아왔다. 정주영 창업주의 장남인 정몽필 사장(당시 인천제철)이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1982년 4월 출장길에 올랐다 서울로 돌아오던 중 그가 타고 있던 승용차와 트레일러가 충돌하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이후에도 불운은 계속됐다. 정주영 창업주의 4남인 정몽우씨가 자살이란 극단적 선택을 한 것이다. 당시 현대알미늄을 이끌던 정몽우 회장은 서울 강남의 모 호텔에서 음독자살한 것으로 알려진다. 평소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던 것이 자살 배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급사·실족사’ 안타까운 죽음
2001년 정주영 창업주가 타계한 이후에도 현대가는 또 한번의 비보를 접해야 했다. 정주영 창업주의 5남이자 현대그룹 적통을 승계한 고 정몽헌 회장이 현대그룹 사옥에서 투신자살한 이유에서다. 대북송금사건의 책임감으로 자살을 택한 것으로 알려지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이 언론 등을 통해 회자되고 있다.
현대가 만큼 갑작스런 불운을 겪어야 한 재벌가는 또 있다. LG가문이 그곳이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고 구원모가 20년의 생도 채우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했다. 고등학생 시절 사망한 구원모씨의 사인이 ‘급사’라는 것 이외에 그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는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LG그룹 황태자의 신분이었지만 꽃을 피우지도 못한 채 지고만 구원모씨. 아들을 잃은 구본무 회장의 비통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일례로 종교를 갖지 않았던 구본무 회장이 아들의 사망 이후 서울 삼청동 칠보사를 자주 찾으며 슬픔을 달랬다. 칠보사에는 구원모씨의 영혼을 위로하는 거대한 석등이 대웅전 앞에 설치돼 있다.
구본무 회장은 이후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의 아들 구광모씨를 양자로 맞았고, 현재 구광모씨는 LG그룹 신(新)황태자로 구원모씨의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LG가 구원모씨처럼 사망과 관련해 구체적인 이야기가 전해지지 않는 재벌가 자제는 또 있다. 바로 롯데가 일원인 고 신동학씨가 그다. 신동학씨는 신준호 롯데우유 부회장의 장남으로 지난 2005년 6월 태국 방콕에서 생을 마감했다.
'롯데가의 악동'으로 소문날 정도로 생전 폭력 사건과 마약 흡입 혐의 등으로 세간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전력이 있는 신동학씨. 그는 태국에 있는 한 아파트 6층 베란다에서 실족사했다. 하지만 어떻게 실족사 하게 됐는지, 누구와 함께 있었는지, 무엇 때문에 그곳에 갔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어 호사가들의 입방아는 여전한 상태다.
아무튼 한국경제 발전사의 중심에 있는 유수 재벌가 대부분이 가족사의 아픔을 가슴에 묻고 있다.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이 명(命)인가 보다. ‘인명재천’이란 말이 생각나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