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카시즘적 풍조가 문학인의 창작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를 현실적으로 보여준 구체적인 사건이 발생한 것은 1953년 휴전 직후였다.
주인공은 나환자 시인으로 명성을 지닌 한하운이었고, 사건 전말은 일부 언론매체가 그의 시집 <<한하운시초(詩抄)>>를 <적기가(赤旗歌)>같은 선동시로 몰아치면서 “민족적인 미움을 주자” 고 매도한데서 발단됐다.
빽도 돈도 없었던 이 문둥이 시인은 졸지에 언론이 만든 ‘문화 빨치산’으로 취급 당해 관련기관으로 불려 다니며 고초를 겪은 뒤 자신의 시를 고쳐 쓰지 않으면 안 될 딱한 처지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는 원작에 되도록 손이 덜 가도록 몇 행을 빼고는 마지막에 한 줄을 첨가한 뒤 시 뒤에다 주(註)를 붙여 창작배경을 변호해야만 되었다.
그날 이후 한하운이란 이름으로 나와 있는 각종 시집이나 연구논문, 각종 전집이나 시선집에도 원작은 간데 없고 빨갱이로 몰려 부득이 고쳐 쓸 수밖에 없었던 시작품을 고스란이 얌전하게 옮겨쓰고 있다.
시에 못지않게 문둥이라는 신체적인 조건에다 애달픈 로맨스로 더 유명했던 한하운은 문학사의 이채로운 존재로서 삽화적으로만 다뤄지면서 정작 그의 사회인식이나 역사적 활동은 도외시 당해왔다. 바로 그 단적인 예가 시 <데모> 개작 한 편에 축약되어 나타난다.
우선 현존 시집에 실린 시 <데모>(1)와 발표 당시의 원작(2) 전문을 소개한다.
(1) <데모 - 함흥학생사건에 바치는 노래>
“뛰어들고 싶어라/ 뛰어들고 싶어라.//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 소리와 함께/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 /아우성 소리 바다 소리.//아 바다 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 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아 문둥이는 죽고 싶어라. ”
(2) <데모>
뛰어 들고 싶어라/뛰어 들고 싶어라. // 풍덩실 저 강물 속으로/ 물구비 파도소리와 함께/ 만세 소리와 함께 흐르고 싶어라. // 물구비 제일 앞서 핏빛 깃발이 간다/ 뒤에 뒤를 줄대어/ 목 쉰 조선사람들이 간다. // 모두들 성한 사람들 저이끼리만/쌀을 달라! 자유를 달라!는/아우성 소리 바다소리.// 아 바다소리와 함께 부서지고 싶어라/죽고 싶어라 죽고 싶어라/문둥이는 서서 울고 데모는 가고.
(1)은 현재 시판 중인 시집에 실린 것으로 부제는 1946년 3월 13일 함흥 학생시위 사건이다. 한하운 자신도 이를 구경하다가 연행 당해 병보석으로 출옥했으나 다시 반국가 사범으로 투옥, 역시 병세 악화로 석방, 나병 치료약을 구하러 월남했다가 귀향 중 피체 당해 이감 중 원산에서 탈옥하여 월남한 것이 1947년 8월이었다고 자전적 시 해설서인 <<황토길>>에서 밝힌다.
(2)는 해방 직후 최대의 종합월간지였던 서울신문 발행 <<신천지>>1949년 4월호에 월북시인 이병철의 추천사와 함께 실린 등단 당시의 작품이다. 이것은 정음사에서 같은 해 5월30일에 낸 시집 <<한하운 시초>>에 그대로 실렸고, 이어 1953년 6월 30일 재판본에도 그대로 게재되었다.
한편 <<서울신문>>은 1953년 10월 17일 <하운 서울에 오다--레프라왕자 환자 수용을 지휘>란 제목의 기사를 작품 <보리피리>와 함께 게재했는데, 사회부 오소백(吳蘇白)부장과 문재안(文濟安)차장의 사임으로까지 비화되었던 이 사건이야말로 매카시즘이 문학만이 아니라 언론계에도 암적으로 작용했음을 엿보게 한다.
문제의 기사는 “4만5천명의 나병환자를 지도하는 문둥이의 왕자가 서울에 나타나서 서울 거리를 방황하는 나병환자들을 시 위생과의 협조아래 수용하기 시작했다”를 서두로 시인이자 나환자로서의 그의 각종 사회봉사활동을 간략히 소개한 뒤 “더욱이 한하운 시집으로 말미암아 문단에 여러 가지 파문이 던져지고
더구나 일부 신문에서는 마치 한하운이란 사람은 유령과 같은 가상인물이라고까지 말하고 있는 지금 한씨의 출현은 나병환자들에게는 물론 문단과 일반에게도 크나큰 센세이션이 아닐 수 없다.”고 그 특종성을 부각시켜 사진까지 게재했다.